수필 24

한 소년이 겪은 6.25 (1)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새벽 4시에 북한 공산군이 38선 전 지역을 일제히 넘어 불법남침을 했고, 긴급히 소집된 국군용사들이 용감히 싸워 막고 있다는 라디오방송 소식을 우리는 교회에서 들었다. 나의 고향은 우리나라 서남쪽 끝자락 목포여서 처음엔 사람들이 피란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7월 중순에 접어들자, 인민군이 충청도에서 전라북도로 넘어왔다는 소식에 사람들이 술렁였는데, 나는 그 때 초등학교 6학년, 학교는 수업을 무기한 중단했다. 이튿날 밤에 근교 영암경찰서 순경으로 근무하는 큰 형이 철모에 군복을 입고 M1총을 멘 늠름한 모습으로 집으로 왔다. 공산군과 싸우기 위해 내일 새벽에 출동하기에 가족과 작별인사차 온 것이다. 큰 형이 부모님과 얘기를 마치고 정중히 큰절을 드린 후, 내 머리를 쓰다듬..

수필 2021.06.16

‘서울 예수' 영화 해프닝

1998년 한국기독교연합단체의 총무로 일하던 어느 날이었다. 문화관광체육부 산하 한국영화심의위원회가 두터운 서류를 우편으로 보내왔다. 봉투를 열어 보니, 이 시나리오를 읽고 소감을 말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이상한 마음으로 시나리오를 들고 보니 제목이 ‘서울 예수’였다. 역시 기독교 문제였다. 서울 어떤 빈민가의 미혼모 출신 ‘예수’라는 청년이 사회와 종교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저항하다가 체포되고 사형 당한다는 내용이었다. 착상이 예수님의 생애를 비틀어서 한국 상황에 맞도록 그럴 듯하게 꾸몄다. 그런데 주인공이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그를 좋아한 ‘마리’와 섹스로 스트레스를 풀었다. 마리는 ‘마리아’를 그들 멋대로 바꾼 이름이었다. 그 영화가 지향하는 목적은 언제나 인간사회가 지니..

수필 2021.04.28

고리타분한 목사

바로 어제 아침이었다. 나는 조반을 기다리며 조간신문을 들추다가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리며, “주여!”하고 탄식소리를 질렀다. 사회면에 난 제법 큰 글자의 제목은 “음주운전 목사, 행인 치고 뺑소니”라는 것이었다. 그 내용은, 서울 종로구 어느 교회의 K목사가 어제 밤에 음주운전 하다가 길을 건너가던 행인을 치어 부상을 입히고 도주하다 경찰에 붙잡혀 구속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 기사에 놀랐다. 내가 몇 번 그를 만났으나 그는 결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가사를 읽고 나자, 내 귀에는 이런 소리들이 들려오는 듯 했다. “목사가 술을 먹었대.” “목사가 술 먹고 운전하다 사람을 치었대.” “목사가 술 먹은 것도 뭐한데, 운전하다 사람을 치고 뺑소니 쳤대.” “아, 이제 목..

수필 2021.03.06

가훈처럼 살아가기

“요즘에도 각 가정에 가훈이 있을까?”하고 가끔 자문할 때가 있다. 그러나 스스로의 대답은 전에와는 시대상황이 너무나 달라 '알 수가 없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내가 자라던 1950~ 60년 때만해도 거의 50% 정도는 가정마다 가훈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친구들 집에 가면 가훈을 써서 붙여 놓은 가정이 반반 정도 되었기 때문이다. 옛적부터 가훈은 가족들에게 하나의 삶의 좌표이기에 가훈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그 가정의 삶의 질적인 수준 차이를 말하고 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본래 우리 집의 가훈은 ‘경천애인’(敬天愛人)이다. 즉 ‘하나님 공경, 이웃 사랑’이다. 아버지가 46세 되던 봄에 친구의 권유로 교회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은혜 받음을 계기로 우리 가족 12명이 교회 가족이 되었..

수필 2021.02.28

전도사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회의 교단 헌법에 의하면, 전도사는 공통적으로 그 교단이 직영하는 신학대학을 졸업한 자로 교회의 청빙 받아 지방회의 승인을 받아야 직분이 주어진다고 했다. 즉 목사가 되기 전, 하나의 인턴과정에 있는 목회자를 의미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한국의 교계에서는 신학대학에 재학 중인 신학생이나, 신학대학에 입학해보지 못한 사람이라도 성경학교를 졸업한 자에게 전도사라고 부르고 있는 실정이다. 그 덕분에 나도 신학대학에 재학 중에 가끔 듣기 시작한 전도사라는 이름이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에게 불려지고 있다. 내가 고교를 졸업하고 신학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6.25 전쟁이 휴전되고 몇 년이 지난 1957년이었다. 한국의 수도 서울이지만 전쟁으로 파괴된 건물이나 도로를 ..

수필 2021.01.21

가정의 달, 푸른 오월에

몇 년 전의 일이다. 지하철을 타고 가던 중 어느 역에서 어떤 젊은 엄마가 유치원생 정도의 남자 아이 둘을 데리고 들어오더니 빈자리가 없자 서서갔다. 조금 있으려니 두 아이가 술래잡기를 하는 지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다니느라 지하철 안이 시끄러웠다. 사람들은 혀를 찼지만 누구 하나 말리는 사람이 없어 보다 못해 내가 일어나 그 아이들을 조용하라고 야단쳤다. 그러자 두 아이 중 하나가 별안간 악을 쓰며 울어 전철 안이 더욱 시끄러워졌다. 그런데도 엄마는 아이를 말리지 않고 그냥 두더니, 별안간 화난 얼굴로 내게 다가와 이렇게 소리쳤다. 나이로는 그녀의 아버지벌 이상 되는데도. “당신이 무엇인데 우리 아이들 기를 죽여요?” 전통적 우리의 부모관은 소위 엄부자모嚴父慈母였다. 어머니는 사랑으로 감싸고 안아서 키..

수필 2021.01.06

내 어린 시절의 삽화들

- 광복과 건국 전 후 조국이 해방되기 직전인 1945년 4월 경, 만 6살이 된 나는 목포북교국민학교 강당에서 가슴에 명찰을 달고 아버지의 손을 잡고 줄 지어 둥그렇게 놓인 탁자들을 돌며 신입생 시험을 보던 생각이 난다. 이것이 나의 두 번째 어린 시절의 기억이다. 그 때 한 일본인 선생이 천연색 그림을 들고 “이것이 무엇인가?”하고 일본말로 묻는 것 같았다. 보니 비행기여서, 나는 “히꼬끼!”하고 대답했다. 그때가 태평양전쟁 막바지여서 자주 목포하늘에 비행기가 뜰 때마다 사람들이 “아, 히꼬끼!”하고 소리치던 것이 생각 난 것이다. 그랬더니 선생이 고개를 끄덕이고 웃으며 뭐라고 하자, 내 뒤에 서계신 아버지가 좋아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잘 했다'고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생각해보면, 한국인이..

수필 2021.01.05

농촌 목회의 부채의식

농어촌은 내 마음의 고향이다. 농어촌에서 1년 이상 살아보지 못한 필자는 그러기에 늘 마음속에 늘 그리워하면서 이상향을 농어촌에 두고 있다.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 고교까지 성장하였으나,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한 후 일하던 무대가 줄곧 도시였기에 필자는 사실 농어촌에 대한 깊은 이해가 부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조금이라도 있다면 6.25전쟁 중 교회 집사님 4가족 30명이 함께 어떤 섬마을로 피란을 가서 3개월 동안 농촌에서 살아 본 경험이 있을 뿐이다. 그때는 초등학교 6학년생이어서 농촌의 수려한 경치와 맑은 공기, 깨끗한 물, 그리고 순박한 인정들을 회고하면 내 삶의 어두운 곳을 밝게 하고, 마음을 탁 트이게 하는 청량제 구실을 해서 미소를 짓게 한다. 그래서 농어촌은 내 마음의 고향이다. 그러..

수필 2021.01.02

사랑의 집짓기 행사

“잘 짓고 잘 짓세. 우리 집 잘 짓세. 만세반석 위에다 우리 집 잘 짓세.“ 1998년 4월 초 어느 화창한 봄날 오전이었다. 이날 남녀 40여 명이 부른 찬송소리가 동대문구 창신동의 한 오르막 길 집짓기 현장에서 온 동네에 울려 펴졌다. 국제헤비다트(사랑의 집짓기운동) 산하 한국본부의 그 해 첫 사업의 시작은 가파른 골목길 달동네로 소문난 창신동에서부터였다. 그 곳 위치는 공사장의 윗쪽에 동인장로교회의 큰 간판이 보였던 것으로 보아 그 아래쪽이 아닌가 싶다. 이 사랑의 집짓기운동 신축공사 착공예배는 당시 한국헤비다트본부(대표 고왕인 박사)의 주관으로 드렸는데, 그들 본부가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소속 기관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때 고 박사를 통해 이 창신동 집짓기 착공예배의 설교 부탁을 받은 나는 처음으..

수필 2020.12.19

그것은 사랑이었다

벚꽃이 튀밥처럼 속속 피어나는 2003년 어느 봄날이었다. 전남 함평 읍 어느 3층에 세 얻어 교회를 개척한 지 2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매주일 오후마다 아내와 함께 인근 종합병원 입원실을 방문, 병실마다 다니며 환자들의 치유 위한 기도와 주님 영접을 위한 권면을 했다. 하루는 그 일을 마치고 병원 3층에서 걸어 내려오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받아보니 서울의 Y장로였다. 사연은, 다음 주일 오전에 자기 교회에 와서 설교해 줄 수 없느냐‘는 것이다. 이유를 물으니 그건 오시면 얘기하겠다고 한다. 토요일 오후 5시까지 부부가 함께 청0동에 오셔서 전화주시면 모시러 가겠다고 했다. 나는 몇 사람 되지 않은 신자들을 위해 아내 친구인 협동여전도사에게 주일 설교를 맞기고, 그 주간 토요일 오전에 서울행 기차..

수필 2020.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