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2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1

이어령 교수(1934~ 2022) 하나님, 나는 당신의 제단에 꽃 한 송이 촛불 하나도 올린 적이 없으니 날 기억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모든 사람이 잠든 깊은 밤에는 당신의 낮은 숨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너무 적적할 때 아주 가끔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기도 합니다. 사람은 별을 볼 수는 있어도 그것을 만들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별 사탕이나 혹은 풍선을 만들 수는 있지만, 그렇게 높이 날아갈 수 없습니다. 너무 얇아서 작은 바람에도 찢기고 마는 까닭입니다. 바람개비를 만들 수는 있어도 바람이 불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습니다. 보셨지요. 하나님, 바람이 불 때를 기다리다가 풍선을 손에 든 채 잠든 유원지의 아이들 말입니다. 어떻게 저 많은 별들을 만드셨습니까? 하나님, 그리고 ..

2024.03.13

봄비를 좋아하십니까

용혜원(목사 시인) 봄날 온 땅에 내려 촉촉하게 적셔주는 봄비를 좋아하십니까 겨우내 추위에 떨며 입술이 메말랐던 땅을 푸근하게 적셔주는 봄비를 좋아하십니까 봄비가 내리면 온 세상이 새싹이 돋고 봄꽃이 피어나 봄의 축제가 열리기 시작합니다. 봄비가 내리면 겨우내 추위에 떨었던 나무들이 기지개를 펴고 기운을 차리고 씩씩하게 자라나 산들마다 초록 옷을 갈아입습니다. 봄비를 좋아하십니까 사람에 목마른 마음을 촉촉하게 적셔주는 봄비가 내립니다.

2024.03.08

3월

나태주(인기 시인) 어차피 어차피 3월은 오는 구나 오고야 마는 구나 2월을 이기고 추위와 가난한 마음을 이기고 넓은 마음이 돌아오는 구나 돌아와 우리 앞에 풀잎과 꽃잎의 비단방석을 까는 구나 새들은 우리더러 무슨 소리를 내보라고 조르는 구나 시냇물 소리도 우리더러 지껄이라 그러는 구나 아, 젊은 아이들은 다시 한 번 새옷을 갈아입고 새 가방을 들고 새 배지를 달고 우리 앞을 물결쳐 스쳐가겠지... 그러나 3월에도 외로운 사람은 여전히 외롭고 쓸쓸한 사람은 쓸쓸하겠지...

2024.03.04

내가 사랑하는 사람

정호승(시인)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며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2024.02.27

이 순간

피천득(1910-2007, 서울대 교수 역임) 이 순간 내가 별들을 쳐다본다는 것은 그 얼마나 화려한 사실인가 오래지 않아 내 귀에 흙이 된다할지라도 이 순간 내가 제2 교향곡을 듣는다는 것은 그 얼마나 찬란한 사실인가 그들이 나를 잊고 내 기억 속에 그들이 없어진다 하더러도 이 순간 내가 친구들과 웃고 이야기 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즐거운 사실인가 두뇌가 기능을 멈추고 내 손이 썩어가는 때가 오더라도 이 순간 내가 마음 내키는 대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은 허무도 어쩌지 못할 사실이다.

2024.02.20

가시나무 새

김소엽 시인(대전대 석좌교수) 아픔을 노래하는 새를 나는 알고 있네 가시에 찔려 내 대신 죽으며 혼신을 다해 영혼을 노래하는 새를 나는 알고 있네 죽어가는 순간 신도 흡족히 미소 지을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남기고 간 가시나무 새여 내 마른 영혼의 가지 끝에 앉아 생명을 바쳐 사랑을 노래한 그 큰 새를 나는 알고 있네 목숨을 잃은 새는 하늘 끝으로 날아가고 그가 남긴 노래는 온 세상을 빛으로 밝히네. ---------------------------------------- 시인은 그가 믿는 예수의 죽음을 전설적인 ‘가시나무 새’로 은유하고 있다. 가시에 찔려 혼신 다해 영혼을 노래하는 가시나무 새처럼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예수의 사랑이 세상을 생명의 빛으로 밝힌다고 노래한다.(소솔)

2024.02.15

천국에서의 쇼핑

김동길 교수(1928~2022) 봄이 오는 길목에 필요한 것들이 많고해서 쇼핑하러나섰어요. 우선 사랑이 절실하여,천국백화점 1층 진열대에 놓여 있는 ‘사랑’을 캇트에 실었지요. 기쁘고 평화롭게 이웃들과 사는 것이 중요해서, 코너에 있는 ‘평화’도 실었어요. 때로는 참지 못할 일도 있어 차곡차곡 쌓여 있는 ‘오래 참음’도 하나 올렸어요. 자비를 베풀 일도 있을 것 같고, 착하고 충성되게 살아야 할 것 같아, "자비"와 "양선"과 "충성"도 담았습니다. 부드러우면서 강하게 사는 것이 좋아 "온유"도 담은 후 아무래도 욕심이 많아 마지막으로 "절제"도 한 묶음 실었죠. 이제는 세상에서 얼마든지 행복하고,넉넉하게 만족하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계산대로 가서 너무 많이 사서 비싸겠다는 걱정하면서, 계산하..

2024.02.13

2월

정연복(서정 시인) 열두 달 중에 제일 키가 작지만 조금도 기죽지 않고 어리광을 피우지도 않는다 추운 겨울과 따뜻한 봄을 잇는 징검다리 역할 해마다 묵묵히 해낸다 겨울이 아무리 길어도 기어코 봄은 찾아온다는 것 슬픔과 고통 너머 기쁨과 환희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그리 길지 않음을 가만가만 깨우쳐 준다 이 세상의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여 나를 딛고 새 희망 새 삶으로 나아가라고 자신의 등 아낌없이 내주고 땅에 바싹 엎드린 몸집은 작아도 마음은 무지무지 크고 착한 달

2024.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