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어령 교수(1934-2022)
불을 끈 방안에서
어머니는 칼을 들어 가래떡을 썰고
아들을 붓을 들고 글씨를 썼습니다.
어머니가 썬 떡은 어둠 속에서도 그 크기와 모양이 똑 같아
한 치도 어긋남이 없었지만
아들이 쓴 붓글씨는 삐뚤빼뚤 어지럽기만 했습니다.
아들아, 아직도 네 공부는 멀었다.
어미가 가래떡을 썰 듯이 매일 한시도 잊지 말고
글씨 쓰기를 게을리 하지 말라.
어머니의 가르침대로 아들은
집을 나가서는 돌다리에 글씨를 쓰고
집에서는 질그릇이나 항아리에다 글씨 연습을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다 알고 있는
한석봉의 어머니와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어머니의 가르침으로 석봉은 조선 제일의 명필가로
국가의 문서를 다루는 사자관이 되어 그 이름이 중국까지 떨쳤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불을 끈 방에서 떡을 썰 듯이
지금은 사람이 기계처럼 반복하는 노동의 시대가 아닙니다.
아무 뜻 없이 암기하고
규격에 맞춰 길들여진 숙련공보다
나만이 개성과 창조력을 길러야 합니다.
불 꺼진 방이 아닙니다.
대낮 햇빛이 쏟아지는 벌판
360도로 열린 광장에서 가르치세요.
삐뚤빼뚤 글씨를 써도 좋습니다.
큰 붓을 들고
네가 쓰고 싶은 글을 마음대로 대지 위에 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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