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한 소년이 겪은 6.25 (3)

유소솔 2021. 6. 25. 01:21

                                                             

 

그러나 곧 통일이 될 것만 같던 우리 아군의 승승장구의 기쁨도 잠시였다.

11월 초 신문에는 중공군 백만 명이 압록강을 넘어 불법으로 참전, 인해전술로 아군이 계속 후퇴하며 악전고투하고 있다는 암울한 소식이었다. 우리는 그때부터 학교에서 ‘무찌르자 오랑케 몇 백만이냐’하는 군가를 배우고 불렀다. 나중에 알고보니, 중공군 50만 명이 참전했는데, 적의 군사 비밀을 정확히 알지 못한 오보였다.

또 한 학기에 한 번씩 국군장병들과 우리를 도우러 온 유엔군에게 위문편지를 써서 보냈고, 이 일을 휴전될 때까지 3년 간 계속했다. 또 교회에서는 우리 국군과 유엔군의 승리를 위해 수요일 저녁마다 기도회를 개최할 때 나도 참석해서 기도했던 일이 생각난다. 중공군 개입이 없었으면 한국은 평화통일이 되었을텐데, 그들이 참으로 미웠다.

 

우리는 12월 중순에 당시 전국 초등학교 6학년을 대상으로 중학교 입학을 위한 국가고시를 치루었다.

이는 전쟁 중 중학 입시제도가 바뀐 것으로 우리는 처음으로 다른 학교에 가서 우리가 모르는 선생님 감독 하에 시험을 치뤘는데, 오늘의 대학입학을 위한 수능시험과 같은 제도였다. 그런데 출제된 문제가 모두 이전의 주관식 아닌 객관식이어서 우리는 미리 훈련을 받았기에 당황하지 않고 잘 치룰 수 있었다.

1월 하순경 개학하여 선생님께 성적표를 받았고 그 점수에 따라 2월에 나는 목포중학교에 지원하여 입학할 수 있었다. 우리는 중학교 입학하자마자 많은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 중에 가장 기억에 남은 영어선생님이 있다. 나하고 성씨가 같은 류(柳) 선생님이기에 잊지 않는다. 나는 버드나무처럼 온순하지만 그 선생님은 달랐다.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매일 하루 10개씩 새 단어를 외우도록 쪽지를 만들어 포켙에 넣고 다니며 외우게 했다. 그리고 매일 영어 시간마다 아무나 몇 사람을 불러내어 직접 포켙 속에 외운 영어 단어 한 장을 꺼내어 물어보신다. 맞게 대답하면 머리를 쓰다듬고 “You are a clever boy" 즉 영리하다고 칭찬하고, 틀리면 “You are a stupid !" 즉 바보라고 욕하며 뺨을 때렸다. 때리면 손이 아프니까, 나중에는 선생님이 신고 다니는 슬리퍼를 벗어서 때렸다. 지금은 선생님들 폭력이 용납되지 않지만 그때는 폭력이 난무했다. 일본식 교육의 잔재였다.

 

우리는 휴전하기까지 한 학기에 한 번씩 국군장병이나 유엔군 아저씨들에게 위문편지를 계속 썼다.

3학년 1학기 때는 딱 한번 영어시간에 유엔군 장병에게 영어 위문편지를 쓴 적이 있다. 누구나 경험했지만, 영문해석보다 영작문은 더 어렵다.  그리고 몇 명을 지명하여 영작문 위문편지를 낭독하게 했다. 영작문이 시원치 않은 학생은 매를 맞으며 공부해야 했다. 이것이 당시 서울이나 지방이나 소위 일류 중고교 수업의 실태였다.

 

중 3의 1학기 때는 자주 휴전반대를 위한 궐기대회와 시가행진에 우리 학생들이 동원되었다.

전국의 중, 고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우리 정부는 휴전을 반대하고 북진통일을 주장했기에, 문교부(교육부)의 지침에 따라 우리 국민들의 뜻을 세계에 보여주는 시위였다. 시위한 다음날엔 어김없이 신문에 보도가 되었다.

아군은 유엔군의 미국 대표를 중심으로 참전국 대표들과 적군은 북한과 중공군 대표 등, 그리고 중립국 대표들이 모여 휴전회담을 1951년 12월부터 몇 차례 가졌으나 의견이 서로 맞지 않았다. 그런데 1953년에 갑자기 속도를 내기 시작하더니 그해 7월 29일에 쌍방합의로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가을학기는 여름방학 중 7월에 휴전이 성립되어 위문편지 쓰기가 중지되었다.

전쟁이란 목숨을 걸고 싸우는 군인들도 힘들지만, 전쟁을 뒷받침하는 국민들도 함께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아낌없이 지원해야 하니 힘들고 고통스런 일이 많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전쟁의 승리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적극 후원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더구나 한국의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한국 군인은 물론 16개국 유엔 참전 젊은 전사자 등 모두 30여만 명 이상 희생을 당했으니 이를 어쩌랴?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북한군은 20만, 중공군 50만 중 약 30만이 전사했다는 기록을 보면, 6.25는 내전이 아닌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 대결에 세계가 동원된 작은 세계대전이었다.

 

주님의 말씀처럼 '온 천하보다 더 귀한 한 사람의 영혼'들이 무더기로 비참하게 죽기에 전쟁은 인류의 적이며,  그동안 인류가 노력해 쌓아 놓은 문화재들을 하루아침에 파괴하는 악마의 작태임이 분명하다. 지도자 한 사람의 잘못된 탐욕이

역사상 수많은 전쟁을 일으켜 많은 생명을 앗아가고, 산천을 초토화 시킨 죄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대결은 1980년 공산주의 본산 소련이 '공산주의 포기'를 선언하고, 동유럽 위성국가들을 독립시키고, 국가도 러시아로 개명함으로 끝났다. 그러나 아직도 탐욕을 버리지 못한 가짜 공산주의의 망령이 북한과 중공에  계속 남아서 우리를 엿보고 있어, 우리는 이를 잠시도 잊어서는 안된다.

 

전쟁이 발발한지 71년, 휴전된지 어느 새 68년이 되었다. 

그동안 우리는 북으로부터 크고 작은 침탈행위를 수천 번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지켜주셔서 전쟁으로 발화되지 않은 것 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또다시 당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 국민들이 6,25의 참상을 조금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한다. 더구나 저들은 지금 핵무장을 하고 위협하지만 우리는 영원한 방패이신 하나님을 굳게 의지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해 저들을 미워하지 않고 튼튼한 안보를 바탕으로 의롭게 살며, 동족이라는 끈 하나를 믿고 북한과 교류하면서 저들의 악한 마음을 사랑으로 변화가 될 수 있도록 나는 날마다 기도의 무릎을 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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