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한 소년이 겪은 6.25 (1)

유소솔 2021. 6. 16. 00:23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새벽 4시에 북한 공산군이 38선 전 지역을 일제히 넘어 불법남침을 했고,

긴급히 소집된 국군용사들이 용감히 싸워 막고 있다는 라디오방송 소식을 우리는 교회에서 들었다.

나의 고향은 우리나라 서남쪽 끝자락 목포여서 처음엔 사람들이 피란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7월 중순에 접어들자, 인민군이 충청도에서 전라북도로 넘어왔다는 소식에 사람들이 술렁였는데, 나는 그 때 초등학교 6학년, 학교는 수업을 무기한 중단했다.

 

이튿날 밤에 근교 영암경찰서 순경으로 근무하는 큰 형이 철모에 군복을 입고 M1총을 멘 늠름한 모습으로 집으로 왔다. 공산군과 싸우기 위해 내일 새벽에 출동하기에 가족과 작별인사차 온 것이다. 큰 형이 부모님과 얘기를 마치고 정중히 큰절을 드린 후,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부모말씀 잘 들으라고 당부하고 떠났다. 이것이 큰 형과의 마지막 작별이었다.

 

7월 20일 경, 교회의 집사 4가정이 함께 피란가기로 하고, 이튿날 아침에 신안군 어느 섬으로 큰 목선을 타고 갔다.

집은 그 때 중학 5학년생 둘째 형이 지키고, 우리 8식구가 함께 목선에 탔는데, 일행이 모두 30명이었다.

전쟁을 모르는 우리 어린이들은 넓은 망망대해를 처음으로 구경하면서 닥치는 대로 누나들이 부르는 동요나 가곡을 따라 부르며 물결을 헤치며 갔다.

 

오후 4시경에 자은도 해안에 도착한 우리는 일행 중에 친척 되는 분을 찾아 이곳에 온 것인데, 우리는 가족에 따라 윗동네나 아랫동네에 각각 방 하나를 얻어들었다. 우리 8식구가 전기도 없는 작은 방에서 여름을 살았다. 여자들은 방에서 자고, 남자들은 마당에 모깃불을 피워 놓고 멍석에서 잤다. 나는 매일 동생들을 데리고 바닷가에서 낚시로 망둥이를 잡아와 반찬을 돕다가, 며칠 후에 이장 댁의 소를 먹이는 목동노릇을 하며 저녁식사 한 끼를 해결하기도 했다.

 

한 달 쯤 후 섬마을에 노란군복을 입은 인민군 두 사람이 나타났다. 그들은 마을 아이들을 공터에 모아 놓고 ‘김일성장군 노래’를 가르쳐서.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고 그냥 따라 불렀다.

이튿날 우리 집에 붉은 완장을 찬 면 내무서 사람이 와서 ‘왜 피란을 왔느냐?’ 등 조사하더니, 아버지께 내일 아침 면 내무서로 나오라고 했다. 아버지는 ‘혹시 내 아들이 순경인 줄 저들이 알까?’하는 염려 때문에 잠을 못 주무셨다.

 

이튿날 피란 온 네 분의 어른들이 함께 한 시간 거리인 내무서에 가자, 면 위원장이 각각 주소와 직업을 묻고, 또 아들이 몇 명이며 무슨 일 하는지, 낱낱이 물었다. 부친은 큰 아들이 경찰인줄 알면 큰 일이 날 것 같아 고민하다 문득 친구 중에 좌익사상을 가진 표00 씨 이름을 대고, 그 친구가 데려갔다고 둘러댔다. 순간 위원장이 놀라며 물었단다.

 “표씨를 아느냐? 그분은 지금 목포시 인민위원장이다. 곧 목포로 연락해 볼 것이니. 모두 돌아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는, 일본에 유학 갔다가 좌익사상에 물든 표씨와 가끔 만나면 좌우익사상에 대해 논쟁했던 일을 일행에게 얘기하고, “공산당을 반대한 내가 있는 곳을 그 친구가 알게 되면 무슨 보복을 할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괜히 표씨 얘기를 꺼낸 것을 후회하면서, 또 며칠 동안 기도하면서도 잠을 설치셨다.

 

며칠 후. 목포의 공업중학교(6년제) 학생회장의 고향인 이웃마을의 성씨네 가족을 지역의 공산분자들이 몰려가 부모와 동생, 어린 조카까지 14여명을 몽둥이와 대창으로 찔러 죽였다는 처참한 소식에 우리는 공포의 분위기 속에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그 마을에 비하면 우리가 머문 마을은 공산당원으로 설치는 사람이 없었는데, 나중에야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여기며 감사할 수 있었다.

 

일주일 후, 면에서 사람이 와서, 목포의 표 위원장으로 부터 “고생하지 말고 목포로 돌아오라”는 연락이 왔다고 전했다. 하지만 우리 일행은 목포로 돌아가지 않고 낮은 자세로 마을 사람들을 공손히 대하고 피란생활을 기도하며 견딜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나도 목동생활을 더욱 착실하게 하지 않을 수 없도록 아버지가 말씀하셔서 그대로 순종했다.

 

어느날, 붉은 완장을 찬 면 직원들이 와서 논과 밭에 심어져 자라는 나락과 밭에 열매들을 다니며 일일이 조사했다.

각 사람들이 소유한 논 한마지기에 나락이 몇 만 송이라고 적고, 또 밭에 수수나 알곡 등 수를 헤아리고 적었다. 이 곡물은 추수해서 인민군 군량미로 가져갈 때 한톨이라도 적으면 처벌을 받는다고 엄포를 놓았단다. 그말을 들은 농민들은 자기들이 땀을 쏟아서 짓는 곡식도 다 빼앗기겠다는 설음에 순박한 여자들이 "아이고, 내 팔자야!" 하며 통곡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어린이지만 공산당은 나쁘다고 아버지께 말했다. 아버지가 얼른 손으로 입을 가리고 "쉿!"하시며, "밖에서 그런 말 하면 너도 우리 식구 모두 잡혀간단다. 알았지?" "예" 그때부터 말조심하며 살라니 참 답답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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