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가훈처럼 살아가기

유소솔 2021. 2. 28. 22:46

 

“요즘에도 각 가정에 가훈이 있을까?”하고 가끔 자문할 때가 있다. 그러나 스스로의 대답은 전에와는 시대상황이 너무나 달라 '알 수가 없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내가 자라던 1950~ 60년 때만해도 거의 50% 정도는 가정마다 가훈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친구들 집에 가면 가훈을 써서 붙여 놓은 가정이 반반 정도 되었기 때문이다. 옛적부터 가훈은 가족들에게 하나의 삶의 좌표이기에 가훈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그 가정의 삶의 질적인 수준 차이를 말하고 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본래 우리 집의 가훈은 ‘경천애인’(敬天愛人)이다. 즉 ‘하나님 공경, 이웃 사랑’이다. 아버지가 46세 되던 봄에 친구의 권유로 교회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은혜 받음을 계기로 우리 가족 12명이 교회 가족이 되었다. 나는 그때 8살이어서 오후 2시에 열리는 주일학교에 다녔다. 2년 후에 아버지가 교회 집사가 된 기념으로 붓글씨로 쓴 한문 <敬天愛人>이 우리 집 안방에 높이 걸렸고, 가끔 우리에게 교훈도 하셨다.

 

우리가 교회의 가족이 된 1946년은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듬해로써 아직 건국하기 전이었다. 그때는 앞으로 세울 국가에 대한 정치 지도자들의 이념이 각각 달라 우파의 이승만, 좌파의 여운형, 중간파인 김 구의 세력으로 나뉘어 서로 비난하고, 지도자를 따르는 극성파 무리들 때문에 사회가 갈등, 폭동과 지도자 암살까지 몇 차례나 자행되는 어둡고 혼란한 시기였다.

 

 아버지 친구 중 일본 유학파인 표씨는 좌파 사회주의자였다. 표씨가 내 아버지를 끌어들이기 위해 계속 유혹했으나 이미 기독교 신자가 된 아버지는 무신론자인 그들과 과감히 선을 긋고 살았다. 그러면서도 가끔 고민하신 것 같다.  가훈의 <경천>처럼 하나님을 공경하기 위해 표씨와 우정을 끊었지만, 또 하나인 <애인>이란 가훈 앞에 갈등이 온 것이다. 그래서 부친은 친구를 설득하기 위해 어느 날 작심하고 만나러 갔다가 사회주의 이론으로 무장된 친구를 당할 수 없어 황급히 도망쳐 와 매일 새벽기도에서 친구의 회개를 위해 기도밖에 할 수 없으셨단다.

 그런 친구와의 냉전은 그로부터 2년 후에 끝났다. 6.25 전쟁으로 우리 가족이 먼 섬(자은)으로 피난을 갔다 3개월 후 돌아와 보니, 아버지의 친구 표씨는 지난 3개월 동안 시 인민위원장으로 있었는데 공산군 후퇴 때 동료들 몇과 도피하다 국군에 체포되어 즉각 총살을 당한 후였다. 이처럼 우리 가훈은 우리 가정을 인도하는 하나의 빛이었다.

 

나는 10남매 중 가훈에 가장 영향을 받은 것 같다. 1956년 고3 때 진로를 앞두고 갈림길에서 몇 달간 고민했다. 하나는 문인의 길, 또 하나는 목사의 길이었다. 고2 때 교내 문예현상모집 당선을 계기로 문예부원과 교지 편집위원을 하면서 국어교사인 소설가 백두성 선생에게 ‘문인’에의 길을 권유 받았다. 동시에 나는 교회의 학생회장과 성가대원, 주일학교 보조 교사를 수행하면서 ‘목사’에의 길을 가도록 담임목사의 기도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나의 고민은 그 해 10월 어느 새벽을 기해 종지부를 찍었다. 그 때 나는 '문인의 길'에 마음을 두고 세계 명작소설을 헌 책방에서 일주일마다 한 권씩 돈을 주고 빌려보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읽은 소설이 빅톨 유고의 ‘레 미제라블’이었다.

 배고파 빵 하나 훔친 죄로 수감된 ‘장발장'은 몇 번의 탈옥 미수로 무려 19년을 수형생활하다 가석방되었지만, 이미 사회에 대한 냉혹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그는 성당 신부의 집에서 하룻밤을 자다 은 쟁반들을 훔쳐 달아났으나, 그를 체포한 경찰에게 “내가 은 쟁반을 준 것”이라고 그를 감싸 주는 미리엘 신부를 통해 난생 처음 따뜻한 사랑을 충격적으로 맛본다.

 

그로부터 10년 후, 장 발장은 어느 도시에서 빈민들의 생계를 위해 인공수정을 연구, 마침내 성공하여 공장을 설립하여 운영하다 몇 년 후 시민들의 추천으로 시장이 되어 가난한 시민들을 돌보았다. 하지만 10년 전의 은쟁반 사건을 계속 추적한 자베르 경사의 검거로 다시 수감된다.

 마침 그때 프랑스 시민혁명이 일어나 무장한 시민군이 감옥을 점령하므로 장발장도 석방되어 시민군을 돕던 중 자베르 경사가 시민군에게 체포된다. 그는 혁명군이 자베르를 죽이려 하자 ‘내 원수이니 내가 죽이겠다’하여 자베르의 몸을 인수 받는다.  장발장은 체포된 자베르를 아무도 없는 강 위 다리로 데리고 가서 그의 포승을 풀어주고 ‘어서 도망가라’고 자유를 준다. 그는 원수를 용서하고 자기처럼 재생의 기회를 준다. 이것은 그가 받은 사랑의 빚을 갚는 길이었다. 그러나 자베르는 죄수로부터 사랑을 입는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 재빨리 다리 밑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만다.

 

나는 이 소설을 밤 세워 읽다 큰 감동의 물결에 휩싸였다가 즉시 무릎을 꿇었다. “주여, 가훈 ‘경천애인’의 교훈 따라 나도 미리엘 신부와 같이 하나님을 잘 섬기며,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목사가 되어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참 길을 안내하겠습니다. 나의 길을 인도하소서.”

그리하여 이듬해 서울신학대학에 입학하고 군복무를 마치고 졸업한 1964년부터 2009년 70세 정년에 이르기까지 만 45년 간 부족하지만 목회자의 사명을 마쳤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경천애인>은 두 토막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이 두 토막이 조화를 이루고 비중이 엇비슷해야 하는데, 늘 나를 돌아보면 전자보다 후자가 더 가벼운 것 같다. 물론 교회 예산으로 해마다 구제활동을 했지만, 나 개인이 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나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86년도부터 월드비전의 재가복지 프로그램에 참여, 대구의 한 소녀가장의 생계 위해 약 5년 간 매월 일정액을 지원했다. 이를 계기로 지금도 용돈을 아껴 기독교복지공동체인 다일, 밀알복지재단의 정기 후원자가 되어 가난한 외국인 아이들의 성장을 돕고, 일 년에 한두 번 격려의 글도 보내고 기도하지만, ‘애인’이란 저울에는 늘 함량미달이다.

 

이제 나이가 있어 큰 이웃 사랑은 못하지만 <이웃을 내 몸처럼>을 좌우명 삼아 작은 실천으로 이 생명 다하도록 계속 하려 한다. 구걸하는 걸인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TV를 보다 불우한 이웃 캠페인 ARS를 보면 한번은 누르고, 지하철에 약한 노인들에게 자리를 내드리고, 연말이면 구세군냄비를 찾아가는 등 소소한 이웃을 찾아 작은 선행을 실천할 뿐이다.

예수께서 ’작은 자들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마 25:40)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께 하는 심정으로 불우한 이들에게 작은 손길이나마 더욱 내밀어보려고 한다. 8순을 넘겼는데도 남을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저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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