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서울 예수' 영화 해프닝

유소솔 2021. 4. 28. 14:57

 

 

1998년 한국기독교연합단체의 총무로 일하던 어느 날이었다.

문화관광체육부 산하 한국영화심의위원회가 두터운 서류를 우편으로 보내왔다. 봉투를 열어 보니, 이 시나리오를 읽고 소감을 말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이상한 마음으로 시나리오를 들고 보니 제목이 ‘서울 예수’였다. 역시 기독교 문제였다.

 

서울 어떤 빈민가의 미혼모 출신 ‘예수’라는 청년이 사회와 종교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저항하다가 체포되고 사형 당한다는 내용이었다. 착상이 예수님의 생애를 비틀어서 한국 상황에 맞도록 그럴 듯하게 꾸몄다. 그런데 주인공이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그를 좋아한 ‘마리’와 섹스로 스트레스를 풀었다. 마리는 ‘마리아’를 그들 멋대로 바꾼 이름이었다.

 

그 영화가 지향하는 목적은 언제나 인간사회가 지니고 있는 정치나 사회의 부조리와 종교, 특히 기독교의 지도자들의 이름이 메스콤에 오르내리는 비리를 겨냥한 것이어서 예수가 성전 비리를 채찍으로 징계한 것처럼 하겠다는 그 의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한국교회의 지도자들도 반성할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 제목이 <서울 예수>라는 것과 주인공의 이름이 <예수>라는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나는 ‘왜 이 영화 상영 허가 문제를 한국기독교 연합기관에 문의했을까?’ 추리해 보았다.

이 영화가 상영되면 기독교에서 항의할 것이 분명하고, 또 그에 대한 사회적 물의가 일어날 것이 자명하기에 만일의 사태를 예방한다는 뜻이 있음을 알았다.

만약 기독교 대표연합기관에서 ‘절대로 안 된다’는 부정적 답변만 하지 않는다면 상영을 허락할 수 있고, 나중에 문제가 된다면 기독교 연합단체에 책임을 떠맡겨버리면 된다고 생각했으리라. 나는 갑자기 공인(公人)의 임무와 책임의 무게를 느끼고, 대표회장 목사님께 ‘서울 예수’에 대한 전말을 전화로 보고 하니, 나보고 알아서 처리하라고 일임해 주셨다.

 

나는 기독교의 공인의식으로 깊은 생각을 했다.

이 영화가 상영되면 ‘예수’라는 신성한 이름이 훼손될 뿐 아니라, 기독교 복음전파에도 부정적 영향이 올 것이란 예측을 한 후, 상영 반대의견 몇 가지를 써서 한기총 대표회장 명의로 한국영화심의위원회로 보냈다.

 

며칠 후였다. 예고도 없이 그 영화의 감독과 남녀 주연, 조연 배우 5~6명이 찾아왔다.

신인 배우들로 모두가 미남 미녀들이었다. 특히 팔등신의 미녀배우가 일부러 내 옆자리에 옮겨 앉았다. 향수냄새가 강하게 풍겨 정신이 어지러울 정도여서 나는 인터폰으로 사무처장 정0택 장로를 불러서 함께 그들과의 대화를 시작했다.

 

그들은 수십억 돈을 드려 고생하면서 다 찍어 겨우 완성된 영화를 상영불허해서 우리는 다 망하게 되었다며, 봐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어느 여배우는 눈물까지 흘렸다. 그 말을 듣고서야 나는 우리의 견해 때문에 상영이 불허된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의 사정을 듣고 보니 인정상 딱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본래 인정에 약한 편이지만 두 눈을 감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건너편에 앉은 사무처장도 고개를 약간 흔들었다. 동감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한 가지 타협안을 제안했다.

제목과 주인공 이름 <예수>를 다른 이름으로 바꾼다면 어떨까? 만약 주인공의 이름과 영화제목만을 바꾼다면 한국영화심의위원회에 상영해도 좋다는 의견서를 보내겠다고 한줄기 빛처럼 기회를 주었다.

그들은 서로 잠시 상의해 보더니, 감독이 대표로 말했다. 즉 이 영화의 내용이 ‘예수’라는 주인공 이름에 맞혀졌고, 또 ‘예수’라는 이름에 이 작품의 큰 의미가 있는데 이름을 바꾼다면 시나리오부터 다시 만들고 영화를 다시 찍어야 한다며,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도 끝까지 반대했다. 앞에 앉은 정 장로도 내 말에 동의하며 한마디 거들었다. 왜? 거룩하신 예수님을 평범한 인간 ‘예수‘로 해석하고, 쓰레기 같은 인간적 이야기로 만든 것은 기독교의 본질을 모독한 것이어서 절대로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계속 호소하고 간청했으나 성과가 없자 40분 만에 인사도 없이 돌아가고 말았지만, 내 마음은 씁쓸했다.

 

감독이 처음에 자기도 주연배우들도 다 교회 신자라고 말한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들이 성도라면, 그들이 믿는 <예수>라는 신성한 이름과 인격을 비틀어서 오늘의 기독교를 폄하하고, 안티 기독교의 붐을 일으켜 돈벌이를 하겠다는 상술에 어안이 벙벙했다. 한국 교회 성도들의 수준이 이런 정도인가? 나는 믿을 수 없었다.

 

그 영화는 끝내 극장에서 상영되지 못했음을 한국영화심의회의 통보로 늦게서야 알았다.

나는 주님의 마음처럼 온유와 겸손하기 위해 늘 기도한다. 그러나 불의에 대해서는 채찍을 들어 성전을 청결케 하신 공의의 주님을 닮으려고 힘쓴다.

또 나는 평생 남을 슬프게 하지 않도록 기도하고 예술을 사랑하는 문인이다. 동시에 나는 주님의 큰 은혜로 구원 받은 성도요, 그 은혜를 전하는 목사이다. 만일 주님의 거룩한 이름을 욕되게 하는 어떤 단체나 정부가 나타난다면 순교자의 정신으로 끝까지 싸울 수 있다. 그러니 이 문제만은 어쩔 수 없었다. 이를 어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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