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고리타분한 목사

유소솔 2021. 3. 6. 00:06

                                                                   

 

바로 어제 아침이었다. 나는 조반을 기다리며 조간신문을 들추다가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리며,

“주여!”하고 탄식소리를 질렀다.

사회면에 난 제법 큰 글자의 제목은 “음주운전 목사, 행인 치고 뺑소니”라는 것이었다. 그 내용은, 서울 종로구 어느 교회의 K목사가 어제 밤에 음주운전 하다가 길을 건너가던 행인을 치어 부상을 입히고 도주하다 경찰에 붙잡혀 구속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 기사에 놀랐다. 내가 몇 번 그를 만났으나 그는 결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가사를 읽고 나자, 내 귀에는 이런 소리들이 들려오는 듯 했다.

“목사가 술을 먹었대.”

“목사가 술 먹고 운전하다 사람을 치었대.”

“목사가 술 먹은 것도 뭐한데, 운전하다 사람을 치고 뺑소니 쳤대.”

“아, 이제 목사들도 믿을 수 없어. 타락한 세상이야.”

 

그러자 문득 며칠 전, 무슨 모임 끝에 식당에서 같은 교단 장로 몇 사람과 식사 후, 차를 마시면서 나눈 얘기가 생각났다.

그 날 그들은 사업상 어쩔 수 없이 접대를 위해 자주 술좌석에 앉아야 하는 고민을 털어 놓으면서, 평소 나와 친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다면서 나의 의사를 물었다.

“목사님, K 교단에서는 주초酒草문제를 개방하고 있기 때문에 사업하는 평신도들이 그 교단으로 많이 옮겨가고 있어요. 이제 우리 교단도 많이 성장했음으로 고리타분한 생각을 버리고 주초 문제를 개방해도 되지 않을까요?”

 나는 그들의 말에 놀라면서도, 주초에 대한 평소 나의 뜻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도이기 때문에 사업상 어려운 일이 많음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술을 마시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취하게 되면죄를 짓게 하는 매개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결하게 살고자 하는 성도는 마땅히 주초를 금하는 것이 신앙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매우 유익합니다.”

 

그러면서 나는 신앙생활하기 전 주초를 매우 좋아하시던 우리 아버지의 예를 들었다. 아버지는 술, 담배를 늘 사업 교제의 매개로 생각하신 애연, 애주가셨다. 그런데 46세, 해방 이듬해에 둘째 아들(고 2)을 전염병 장티부스로 잃은 후, 왕창 술을 마시고는 심한 주사를 부려 우리 가족들이 밖으로 도망을 갔던 일도 자주 있었다.

  그러나 며칠 후 어느 후배의 권면으로 딱 한번 나간다고 약속하고 참석한 집회에서 부흥사 이성봉 목사님의 설교에 그만 감동 받아 예수를 믿겠다고 두 손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 이튿날부터 새벽기도회에 나가기 시작하더니, 한달 후에 누구의 권면도 없이 스스로 담배와 술을 딱 끊어버리는 결단을 보이셨다.

  믿기 시작한지 2년 만에 집사, 4년 만에 장로 장립되어 교회를 섬겼는데, 평소 약하던 몸이 강건해져 교회법 70세의 시무장로 은퇴를 당회에서 적극 만류하여 80세로 연장할 것을 임시 결의하므로 86세까지 건강하게 사시다 소천하셨다는 것을 말했다.  그러면서 주초문제는 교리의 문제보다 인생의 문제라며, 그들의 말처럼 고리타분한 얘기를 결론처럼 말했다. 그런데 그 주초문제가 바로지금  한국 교회의 현실로 나타나게 될 줄이야.

 

문제의 K 목사는 비교적 자유적이라는 K교단에 소속된 목사로, 학식도 매너도 세련되어 교계에서는 장래가 촉망되던 40대 목사로 알려진 사람이다. 또한 그의 운전경력은 10년이 넘어 베테랑 급이었으며, 또 그가 운전부의로 행인을 치었다고 해도 뺑소니를 칠 그런 위인이 아니라고 나는 평소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그가 행인을 치어 6주의 부상을 입혔고, 도주하다가 붙잡혔다고 신문마다 크게 사진과 함께 보도할 정도로 파렴치한 행동을 했으니, 그에게 어떻게 그런 행위가 나올 수 있었을까?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 대답은 너무나도 자명했다. 한마디로 그가 음주를 했기 때문이다.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날 밤 그가 음주를 했기 때문에 사고를 냈으며, 또 그가 취중이었기 때문에 그의 이성과 도덕성이 마비되어 그를 뺑소니치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뺑소니 운전자는 무조건 구속한다’는 경찰당국의 방침에 따라, 그가 신분이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즉시 구속된 것이 아니겠는가.

 마침 오늘은 토요일이다. 내일 주일에 교회에 나올 성도들의 마음이 어떨까? 담임목사의 파렴치한 행동이 매스컴에 낱낱이 보도되었으니, 그 교회의 성도됨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신자들의 많이 교회를 떠나지 않을까? 또 그가 법대로 처리된 후, 석방되어 나왔을 때 그 교회의 성도들이 전과 같이 존경할 수 있을까? 동료의식 때문인지, 나는 이런 저런 생각들로 마음이 우울해졌다.

 

그렇다. 술을 마시는 것은 죄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K 목사처럼, 술을 마신 것이 하루아침에 인격이 파멸되고, 사회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어 기독교 전도의 문을 가로 막는 것이 되었으니, 어찌 이것이 죄가 아닌. 작은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또한 이런 일들이 주초를 금하고 성결하게 살고자 하는 경건한 성도와 목사들을 고리타분하다고 비웃는 성도와 목사들에게서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을까?

  나는 지금도 100년 전, 한국교회 초창기 때 미국 청교도의 영향을 받은 경건한 선교사들이 성도의 주초를 금하게 한 조치는 매우 훌륭한 정책이었다고 믿고 있다. 또 그때와 달리 요즘은 시대가 아주 많이 달라졌지만, 아직도 주초문제를 대개의 복음적 교단들이 헌법으로 보수하는 전통을 잇고 있다는 것에 나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도 별 수 없이 시대에 뒤떨어진 고리타분한 목사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나는 나의 삶에 큰 영향을 주신 은사 정진경 목사님의 말씀을 늘 기억하면서, 오히려 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으니, 이를 어쩌랴?

 

“오늘의 크리스천은 신앙은 보수적으로, 삶은 진보적으로 살아야 한다. 흔히 진보주의는 주초를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진보주의와 진보적 삶은 다르다. 한국에도 진보주의 교단의 큰 어른들은 결코 주초를 하지 않는 진보적 삶을 살고 있다.”

 

- 월간 활천(1986년 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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