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전도사

유소솔 2021. 1. 21. 22:19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회의 교단 헌법에 의하면, 전도사는 공통적으로 그 교단이 직영하는 신학대학을 졸업한 자로 교회의 청빙 받아 지방회의 승인을 받아야 직분이 주어진다고 했다. 즉 목사가 되기 전, 하나의 인턴과정에 있는 목회자를 의미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한국의 교계에서는 신학대학에 재학 중인 신학생이나, 신학대학에 입학해보지 못한 사람이라도 성경학교를 졸업한 자에게 전도사라고 부르고 있는 실정이다. 그 덕분에 나도 신학대학에 재학 중에 가끔 듣기 시작한  전도사라는 이름이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에게 불려지고 있다.

 

 내가 고교를 졸업하고 신학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6.25 전쟁이 휴전되고 몇 년이 지난 1957년이었다. 한국의 수도 서울이지만 전쟁으로 파괴된 건물이나 도로를 당시 국가 재정이 부족해서 조금씩 고쳐나가던 형편이었고, 모두가 살기 힘든 시절이어서 나는 새양복을 맞추지 못하고 몇 개월 간 고교 교복을 명찰을 떼고 입고 다녔으나 부끄러운 줄 몰랐다. 

 2학년 때 어느 주일에, 부탁 받은 어린이 설교를 하러 내가 어느 교회에 갔을 때였다. 사회를 보던 부장 집사가 나를 ‘전도사’라고 소개를 해서 놀라면서도 생후 처음으로 어떤 감격스러움도 맛 보았는데, 그래서일까, 그날 신나게 어린이 설교를 했다. 교회마다 어려워서 사례비가 없었으나 전도사라고 불러준 이유 때문에 그냥 좋았다.

 신학생 때는 가끔 여름성경학교의 지도자 강습회의 강사로 불러 다니기도 했다. 그 때 주최 측은 포스터에서 부터 나를 전도사라고 소개를 해서인지, 나를 더욱 기도하게 하였고 강한 사명감에 이끌려 그 집회를 은혜롭게 마치기도 했다.

 

학보병으로 제대한 후, 고아 약 3백여 명을 수용하고 있는 전남 영광 00보육원 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다. 9월이 되어 나는 못 마친 신학대학의 한 학기를 마치려고 서울의 학교 기숙사에서 일주일마다 통근을 했다. 길이 멀어서 금요일 밤 10시에 서울역 출발하는 호남선 완행열차를 타고 이른 아침에 장성역에 내려 국밥으로 아침 식사를 한다. 그리고 버스로 갈아타고 2시간 만에 영광읍에 내린 후, 걸어서 들어가는 고달픈 8Km의 길을 전도사라고 불러주는 많은 아이들 때문에 나는 피곤한 줄 모르고 한 번도 빠져 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전도사라는 이름이 항상 나를 감격스럽게 한 것만은 아니었다.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두고 1961년 논산훈련소에 입대했을 때였다. 훈련소 내무반에는 각기 사호적 다른 신분들이 군

대라는 이유로 인간이하의 대우를 받고 있었기에 자존심 때문인지 누구 하나 자기의 사회적

신분을 밝히기를 꺼려했고, 누구도 묻지도 않은 것이 당연한 분위기였다.

 어느 날 선임하사가 편지를 한 웅큼 가지고 내무반으로 들어와 편지를 배달했다. 그 때 맨 먼저 편지의 수신인을 불렀는데 그게 바로 나였다. 선임하사가 편지봉투에 써있는 그대로 “훈련병 000 전도사님 귀하”하고 불러서, 온 내무반은 그만 폭소의 도가니가 되었다. 입대 전까지 일하던 서울 00교회의 학생회장이 보낸 편지 때문에 맨 먼저 내 신분이 폭로되기도 했다. 기왕 신분이 알려졌으니 나는 힘이 든 중에도 미소를 머금었고, 자주 동료들에게 위로를 하기도 했다.

 

이토록 나를 감격케 하는 전도사라는 이름이 막상 신학대학을 졸업하여 그 주인공이 되자, 전과 같이 매력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전도사'라는 이름 때문에 난처한 일이 생기기도 했다.

 전남 M시에서 가장 큰 B교회의 전도사 시절이었다. 초교파적으로 20대와 30대의 젊은 교역자들의 모임이 있는데, 하루 전에 내게 온 전화는 성결교회를 대표해서 꼭 참석해야 한다는 권유였다. 평소 잘 아는 장로교의 연배이며, 같은 성씨인 Y준목의 전화 성화 때문에 나는 처음으로 참석했다.

 개회예배를 마치고, 회의를 시작할 때 그 모임의 총무가 신입회원을 소개한다면서, 나에게 앞으로 나와서 간단히 자기 소개를 하라고 했다. 나는 앞에 나가서, “B성결교회에 시무하는 000 전도사입니다.“하고 간단히 소개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실례지만, 신학대학을 졸업했느냐?” 고 물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자, 나를 아는 Y 준목이 얼른 나와서 “류전도사님은 서울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신학대학원 2년 수료했고, 현재 총회의 목사고시를 전 과목 패스했으나, 아직 나이가 만 30이 되지 못해 전도사로 있다.”고 필요 없는 말까지 동원해가며 나를 소개했다.

 그러자 회원들은 나를 두고, 그러면 준목이나 강도사로 대우해야 한다는 등 서로 의논하는 것을 보며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 제자리로 돌아갔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들의 모임 구성원에 전도사는 하나도 없고, 30대 목사나 준목, 그리고 강도사들뿐이었던 것이다.

 당시 M시는 주위에 많은 섬들이 있고, 그 곳에 있는 많은 교회에 신학대학을 나온 목회자가 부족해서 장로교 교파마다 M시의 노회가 고등성경학교를 개설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이 성경학교 졸업자에게 전도사라는 이름으로 섬 교회에 파송을 했음으로, 서울이나 광주에서 신학대학을 나온 준목이나 강도사들에게 전도사는 그들보다 수준이 낮은 이름이었다. 이처럼 교계에는 목사- 준목- 강도사- 전도사라는 계급이 아닌 계급으로 인정을 받던 게 현실이었다.

 

그러나 이제 나도 전도사라는 정든 이름과 헤어져야 하는 계기가 다가왔다. 나는 지난 1월 25일부로 만 30세가 되었고, 오는 4월의 총회에서 최종 목사고시와 함께 면접을 보고 합격하면 대망의 목사안수를 받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성직자는 주님의 뜻에 따르는 법이어서 장담할 수 없지만, 만일 오는 총회 때 내게 목사안수의 은총이 내려진다면 그 때 나는 10여년 동안 나와 동행한 전도사라는 이름을 순식간에 잃어버리는 서운함도 맛 볼 것이다.

  동시에 나는 내 생애에 최고의 감격을 또한 경험할 수 있으리라. 왜냐하면 나는 준목이니, 강도사니 하는 2단계의 이름을 단번에 뛰어 넘어 더 이상 오를 데가 없는 목사라는 최고봉에 하나님 은혜로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으리라.

                                                                                                  - 월간 활천(1969. 4호) 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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