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농촌 목회의 부채의식

유소솔 2021. 1. 2. 23:42

농어촌은 내 마음의 고향이다. 농어촌에서 1년 이상 살아보지 못한 필자는 그러기에 늘 마음속에 늘 그리워하면서 이상향을 농어촌에 두고 있다.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 고교까지 성장하였으나,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한 후 일하던 무대가 줄곧 도시였기에 필자는 사실 농어촌에 대한 깊은 이해가 부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조금이라도 있다면 6.25전쟁 중 교회 집사님 4가족 30명이 함께 어떤 섬마을로 피란을 가서 3개월 동안 농촌에서 살아 본 경험이 있을 뿐이다. 그때는 초등학교 6학년생이어서 농촌의 수려한 경치와 맑은 공기, 깨끗한 물, 그리고 순박한 인정들을 회고하면 내 삶의 어두운 곳을 밝게 하고, 마음을 탁 트이게 하는 청량제 구실을 해서 미소를 짓게 한다. 그래서 농어촌은 내 마음의 고향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부터 30여 년 전 성년일 때 딱 한 번 농어촌에서 잠시 살아본 적이 있다

그때가 19649월 초였다. 신학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때 선배의 소개로 경기 여주  

남한강변에 있는 00리 마을교회의 총각전도사로 6개월 정도 담임한 적이 있었다.

말이 담임이지 장년교인 10여 명에 교회 건물만 흑벽돌로 20평 덩그런히 지워 놓았고,

교역자 주택도 없어 남자집사의 집에 작은 방 하나를 갈 때마다 숙식을 제공 받을 정도였다. 그러기에 나는 주간에는 서울의 대학 기숙사에서 공부하다 토요일 오전에 시외버스로 내려왔다가 월요일 오전에는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반쪽 목회생활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총각전도사여서 그랬던지 동네 처녀들 10여 명이 교회에 나오는 바람에 덩달아 마을 총각들도 나왔다. 나는 마을 총각들의 모임인 4H구락부 토요모임에 파고들어 농촌의 진흥과 인생의 길을 모색하는 대화에 적극 참여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를 해줬다. 그 결과 젊은이들 30여 명과 장년들 10여 명이 함께 모이는 제법 활기찬 교회로 조금씩 성장해 갔다.

그 때 기억나는 것은 추석 때 이웃마을의 청년들이 우리 마을에 배구시합을 도전해 온 것이다. 그래서 내가 신학대학 시절 배구선수 출신이어서 마을의 명예를 걸고 교회의 청년들을 코치해 가면서 함께 어울려 승리하는 바람에 마을 어른들이 교회를 좋게 평한 적도 있었다.

 

또 하나는, 그 해 성탄절을 맞아 풍금도 없이 총각처녀들에게 캐롤을 합창 2부로 가르쳤다. 그래서 성탄절 이브를 설익은 음악예배로 드린 후, 새벽에 온 성가대원 10명과 함께 성탄절 새벽송을 집집마다 찾아가 불렀다. 처음이라고 했다. 그리고 동터오는 새벽에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올라가 기쁘다 구주오셨네를 힘차게 부른 후, 마을의 평화와 구원을 위해 소리쳐 기도했던 것이 떠오른다. 모두들 재미있고 좋았다고 했다. 그리고 작은 교회이기에 그 나름대로 교회 발전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기도했다.

 

그런데 이듬해 2월 초 고향의 모()교회의 담임목사의 간곡한 편지가 왔다. 내용은 전도사로 와서 성가대와 교육을 전담해 목회를 도와달라는 부탁이었다. 평소 존경하는 목사님이어서 거절할 수가 없어, 학업도 중단하고 급히 친구 전도사를 후임으로 부임 시킨 후, 그 농어촌교회를 떠난 것이 지금까지 돌아가지 못한 농어촌목회에 대한 아쉬움이다.

 그 후 목사가 된 후, 인천에서 교회개척과 성전건축 목회 등 몇 교회목회와 서울 총회본부에서의 교육목회까지 모두 32년의 목회를 이어왔다. 이제 정년 은퇴까지 남은 10년 간 사역의 시간을 마음속에 아스라이 남아 있는 농어촌에서 마칠 수 있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지난 2월 초 교단본부의 추천으로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약칭)의 총무에 응모하기 위해 이력서를 제출했으나 한 달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어 포기한 상태로 하나님의 뜻을 묻고 기도했었다. 그러던 중 경기도 용인의 40여 명 모이는 아담한 농촌교회에서 청빙이 와 그곳 제직들과 상면도 하고 4월 초에 부임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한기총에서 328일에야 필자를 급히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필자는 전화로 농촌목회지가 정해졌다고 거절했지만, 필자와 절친한 선배 목사까지 동원해 대표회장이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간곡한 요청에 응한 것이 그냥 붙잡혀 지금 이곳에서 산적이 쌓인 업무 속에서 일하고 있어, 농촌교회에 대한 부채의식을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이 부채를 갚기 위해 중국의 시인 도연명처럼 귀거래사를 쓸 날만을 기도한다. 동시에 갈수록 피폐해가는 농어촌과 농어촌교회에 대한 정책적이고 실제적인 연구를 시급히 한기총에서부터 서둘러야 한다는 결심을 굳게 다짐해 본다.

                                                                                               - 농어촌교회신문(199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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