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그것은 사랑이었다

유소솔 2020. 12. 18. 00:00

벚꽃이 튀밥처럼 속속 피어나는 2003년 어느 봄날이었다. 전남 함평 읍 어느 3층에 세 얻어 교회를 개척한 지 2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매주일 오후마다 아내와 함께 인근 종합병원 입원실을 방문, 병실마다 다니며 환자들의 치유 위한 기도와 주님 영접을 위한 권면을 했다.

하루는 그 일을 마치고 병원 3층에서 걸어 내려오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받아보니 서울의 Y장로였다. 사연은, 다음 주일 오전에 자기 교회에 와서 설교해 줄 수 없느냐는 것이다. 이유를 물으니 그건 오시면 얘기하겠다고 한다. 토요일 오후 5시까지 부부가 함께 청0동에 오셔서 전화주시면 모시러 가겠다고 했다.

 

나는 몇 사람 되지 않은 신자들을 위해 아내 친구인 협동여전도사에게 주일 설교를 맞기고, 그 주간 토요일 오전에 서울행 기차를 타고 갔다. 모처럼 여행이어서인지 아내는 기분이 좋았다. 시골에 내려온 지 2년 만에 아내는 조금씩 우울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우리는 남양주시 청0동에 가서 Y장로 내외분의 환영과 분에 넘치는 저녁식사 대접을 받고 작은 모텔에서 일박한 후, 주일날 교회에 가서 예배를 인도했다. 3~40명 신자들로 아담한 교회였다. Y장로가 신학대학원을 나온 아내를 위해 빌딩 3층만을 매입, 교회를 세우고 담임전도사로 세웠다. 예배 후 점심을 함께 먹으면서 Y장로가 나를 초청한 이유를 말했다.

 

10년 전 사업의 부도로 생활이 몹시 힘들었을 때 자기 아내를 총회본부 교육국에서 몇 년 간 일하게 해주신 덕에 자기가 재기할 수 있었다면서 그 고마움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더구나 2년 전 이곳에 교회개척을 하시려다 자기네가 먼저 이곳에 개척하는 바람에 개척을 접고 말없이 먼 호남지방에 가서 개척하신다는 소식을 누구에게 듣고 충격 받았다가 이렇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시고 싶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잊고 있던 일을 다시 생각하면서, “장로님, 그런 일들은 목사라면 누구나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까? 별로 특별한 일도 아닌데 이렇게 초대하고 잘 대접해 주시니, 제가 오히려 감사할 뿐입니다.”하고 고개 숙였다. 식사 후, 두 내외분의 송별을 받고 우리 내외는 전철을 타고 서울역에서 호남행 열차로 갈아타고 내려가면서, 아내가 설교 사례비로 받은 봉투를 꺼내보더니 놀란다. 보통 두 배쯤 되는 액수였다. 나는 분에 넘치는 대접 받은 것에 감사하면서, 기차 좌석에 머리를 묻고 그때의 일을 잠시 회고해 보았다.

 

그때는 내가 교단 총회본부 교육국에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친한 후배목사가 어떤 40대 여자 분과 함께 찾아왔다. 그가 소개하기를 서울 S여대 역사과를 졸업하고 여중에서 교사생활 6년 만에 결혼으로 직장 사임하고 남편과 함께 교회 일에 열심히 돕다 담임목사 권면으로 서울신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교회 협동전도사로 있는 H전도사라고 했다. 그런데 1년 전 남편의 사업부도로 자녀들과 생활이 매우 어려워 일할 곳을 찾고 있으니, 나에게 선처를 부탁한다고 했다.

 

당시 우리는 기독교교육 전문 간사 5명과 사무원 3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어 인원 여유가 없었기에 거절하려다 잠시 주님이라면 이를 어떻게 하실까?’ 생각하니, 긍휼한 마음이 스며들었 다. 그때 교육국 주관으로 총회본부 도서실을 만들기 위해 책을 쌓아 놓고 있었는데, 이를 분류하고 정리할 필요가 있음을 알고, 임시 직원으로 고용하여 약 2년 간 근무하게 했는데, 남편이 재기하게 되자 스스로 사임한 일이 있었다.

 

또 그때는 내가 처음으로 잠시 쉬고 있을 때였다. 1964년 신학대학 졸업과 함께 시작된 목회사역은 전도사, 담임목사, 총회본부 국장,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총무 등 36년 간 연속되는 삶이었다. 총무 3년 임기 마치고 나니 어느덧 62세 황혼기였다. 하지만 목회 정년은 아직 8년이 남았기에 황혼의 노을처럼 그런 삶을 위해 새벽기도회에 매달리던 어느 날이었다.

갑자기 청0동이 생각났다. 서울 접경 남양주시에 속한 곳으로, 몇 년 전 아내가 신문을 통해 새로 분양하는 아파트를 후일을 위해 싼값에 분양 받아, 전세로 준 일이 있었다. 나는 청0동 얘기를 아내에게 하고, 그곳에 성결교회가 없다면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개척하기로 했다.

 

우리는 며칠 후에 달려갔다. 처음 분양 받을 때와 전세 줄 때 딱 두 번 왔던 곳인데,       

길가에 20층 주공아파트 단지 일천세대가 길게 서 있어 도시처럼 활기가 보였다.

몇 교회를 살폈으나 타 교단이었다. 그러다 북쪽 큰 길 가 5층 빌딩의 3층 유리창에

성결교회라고 페인트로 쓴 글을 보았다. 나는 확인하고 싶어, 빌딩 옆에 차를 세우고

3층으로 걸어 올라갔으나 교회 문이 잠겨있었는데, 주보함에 주보가 있어서 살펴보다

놀랐다. 담임 목회자가 H전도사였기에 나는 아내를 재촉해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오는 길에 아내에게, “성결교회가 없는 곳에 개척하려고 했는데, 이곳에 성결교회가 생겼으니 다른 곳을 알아보자고 말했다.

 

며칠이 지난 후, 후배목사가 전화로 나의 진로 때문에 기도한다고 하기에 내가 어제 청0동에 갔다 온 이야기를 했다. 그는 그곳은 전망이 있어 같은 교단 교회가 있어도 괜찮을 것 같다고 했다. 그래도 개척자가 내가 잘 아는 후배 여전도사이기에, 그만 두고 딴 지역을 알아보고 있으니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 후 한 달 후에 평소 문학관계로 잘 알고 지내는 K장로의 권유로, 성결교회가 없는 먼 함평읍에 가서 개척을 했던 것이다.

 

우리는 2년 반을 시골에서 버티다 아내가 우울증세가 심해지자, 서울 세브란스 신경외과 전문의의 권면으로 시골을 탈출하여 만 3년 만에 개척교회를 접고, 서울로 올라와 마침 전세기간이 만료된 청0동 아파트에 들어갔다. 그리고 서울 마포 서부교회의 협동목사로 영입되어 주일마다 서울로 예배하러 다니는 사이 아내는 우울증이 어느 덧 사라졌다. 그래서 청0동교회 Y장로 내외를 찾아가 인사드렸더니, 무척 반가워했다. 그동안 H전도사는 목사가 되어 있었다.

 

그로부터 5년 후, Y장로가 서울 S병원 입원실에서 위독하다는 소문을 듣고 이튿날 아내와 함께 병문안을 갔다. H목사는 그곳에 없고 병상을 지키는 간병인에게, 내 명함을 주며 병문안 왔다고 하니 며칠 동안 장로님이 혼수상태에서 계속 헤매고 있다고 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소망의 찬송을 부른 후, 주님이 장로님을 위해 예비해 놓으신 하늘나라에 이제 들어가서 천사들의 위로 받으며 안식하시라고 권면하고,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왔다.

 일주일 후, H목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가 병원에 다녀간 후, 남편이 금방 편안히 잠자듯이 그날 저녁에 소천하였다면서, 장례를 잘 치른 후 이제야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나는 좋은 남편과 행복하게 산 것을 축하한다면서 남편의 장례를 치루시느라 고생이 많았다고 위로했다. 그녀는 전화를 끊을듯하다 마지막 말을 남겼다. 남편이 마지막 며칠 동안 목사님을 무척 기다린 것 같은데, 왜 그런지 잘 모르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나는 미소를 머금고 혼자 말했다. “그것은 사랑 때문이지요.“ .

                                                                                - 기독교문인협회 '사랑' 주제 수필집 수록(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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