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윤동주와 송몽규의 우정

유소솔 2020. 12. 15. 23:51

 

며칠 전, 한국명시선집을 읽다가 윤동주의 서시에 이르렀다.                               

그냥 외울 수 있기에 그의 서시를 보지 않고 소리로  낭송가의 심정으로 낭송을 했다.

그 순간 문득 그의 시비가 세워진 중국 용정의 대성중학교의 뜰이 나타나며 어떤 감회에

잠시 젖기도 했다.

 

나는 2001년에 중국동포사랑방문단의 일원이 되어 북경과 조선족 자치주 길림성의 수도 연길延吉을 다녀왔다. 문인으로 구성된 우리 방문단은 스케줄에 따라 북경에서 조선족 문학인들과 만나 시로 서로 교류한 후, 조선족의 문학적 고향이고, 옛 우리조상의 독립운동 무대였던 용정龍井을 다니며 감동에 젖은 하루를 보냈다.

특히 민족의 시인 윤동주尹東柱에게 사상과 문학을 일깨워준 옛 은진(오늘의 대성)중학교를 방문하면서 운동장 중앙에커다란 바윗돌에 새겨진 그의 '서시'를 읽으면서 필자는 역사문학이라는 명제를 생각하게 했다. 학교의 2층을 모두 방문객을 위한 소개소로 꾸미고, 각방마다 학교의 연혁, 출신인물들의 사진과 생애를 간략하게 적은 화보 등이 우리의 발걸음을 계속 더디게 했다.

 

학교에서 내세운 이곳 출신들의 인물들이 거의 4백명으로 상당히 많아 감탄하게 했는데, 그들은 인물들을 크게 두 종류로 분류하고 있었다.  하나는 문학적인 인물과 또 하나는 정치적(독립운동) 인물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가장 관심을 쏟은 인물은 단연 윤동주 시인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윤동주와 같은 1917년에 태어난 동갑내기로, 3개월 먼저 태어나 동주의 외사촌 형이면서 죽마고우로 함께 자라고 거의 비슷한 활동을 하다 죽은 송몽규宋夢圭라는 문인이 있었음을 그곳에서야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용정의 명동촌 동주의 집에서 살면서 같이 은진학교를 다녔고, 함께 서울의 연희전문학교를 거쳐 일본유학까지 함께 갈 정도로 거의 쌍둥이 같은 행보에 놀랐다.

윤동주는 교토 동지사대학 영문과에, 송몽규는 교토제국대학 사학과에 입학하여 공부하다 1942년에 각기 조선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되어 2년 징역을 언도받고 복역 중 일본 군부의 잔인한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어 처참한 일생을 마친 것도 같았다.

어쩜 이럴 수 있을까.

 

두 사람은 어린 중학생 때부터 문학적 천재성이 엿보였다고 한다. 윤동주가 은진중학 시절에 초 한 대’, ‘삶과 죽음’, ‘내일은 없다등의 시를 교지에 발표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연희전문 시절에 1941년에 유명한 서시를 발표했다.

이에 비해 송몽규는 은진중학 시절인 193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콩트 숟가락이 입선 되었고, 그 후 문예지에 하늘과 더불어등 시를 계속 발표하는 등 처음에는 문학적 열정이 동주보다 조숙했다. 그래서 동주는 라이벌 의식을 느끼고 더욱 분발하는 계기가 된 소울메이트 사이였음을 평론가들은 지적한다. 성격이 서로 달라 동주는 조용한 편이고, 몽규는 활달한 편이지만, 서로 격려하고 때로는 라이벌 의식이 서로 더욱 분발시키는 계기가 된다. 이것이 참 우정이다. 

두 사람 모두 고통스러운 민족의 수난기에 태어나 성장하며 민족의 고난을 몸소 겪으면서 이를 분노로 표출하기보다 문학적으로 승화하기에 힘쓰다 청춘 27세에 일제의 만행에 희생된 아까운 우리의 애국지사임에 틀림 없다.

 

 그들의 사후에야 윤동주는 민족의 시인으로, 송몽규는 청년문사와 독립운동가로 후대의 추앙을 받게 된 것은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한국인들의 대개가 송몽규는 알지 못하고, 윤동주만을 기억하고 있으니 왜 일까?  그의 민족성을 초월하는 깨끗하고 드넓은 인류애를 노래한 서정시 때문이리라. 

윤동주는 우리 민족의 가슴뿐 아니라 심지어 원수의 나라 일본의 양심적 지성인들의 가슴에까지 찾아들고 있으니, 놀랄 수밖에 없다. 해마다 2월이면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2백여 명의 일본인들이 그가 순국한 후꾸오까 형무소의 잔디밭에 모여 조화를 한 손에 들고, 서로 돌아가며 그의 시를 낭송하며 그를 기린다고 한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그의 대표작 서시때문일 것이다. 일본인들이 해마다 그를 추모하며 낭독한 시가 서시였다고 하니. 그의 '서시'의 

진가를 알 수가 있다. 일본 뿐 아니다. 2008년 한국의 현대시 100주년을 맞아 KBS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 제1위가 바로 윤동주의 서시였다. 그는 생전에 문인 등용문인 신춘문예나 문예잡지 등을 통해 정식으로 등단한 적도 없는 무명 시인이 아니었던가? 어쩌면 이럴 수가 있을까?

 

해방 후, 그의 연전延專 친구 정병욱 교수가 소지한 그의 작품들을 간추려, 그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이름으로 간행한 것인데, 이때 비로소 그의 이름이 알려졌고, 동시에 그의 서시에 많은 독자들이 매료되기 시작했다.

예술가는 그의 작품으로 말한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그의 서시는 어떤 작품인가? 그 내용은 기독교적인 삶, 즉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는 성결하고 인류애의 삶을 살아가도록 조용히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기독교적 언어 하나 없는 이런 문학적 감동은 국가나 민족, 종교의 장벽을 뛰어 넘어 무형적 인류의 참된 공동의 자산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 사랑과 진실, 겸손과 희생, 그리고 평화와 구원이라는 기독교적 가치관이 작품 속에 녹아 있는 기독교문학이야말로 인류의 사랑과 평화, 그리고 구원을 위한 하나의 위대한 선교적 사역임에 틀림없다. 이는 역사 속에 기리 향기로 남겨질 뿐 아니라, 이를 통해 인류는 감동적 삶을 계속 잉태할 수 있기에 크리스천 문인들의 사명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나는 오늘도 윤동주의 서시를 소리 내어 읊는다. 같은 해에 한 곳에서 태어나 줄곳 같은 학교와 유학까지, 그리고 같은 죄명으로 같은 장소에서 희생당하고, 같은 고향 명동촌에 묻혀 삶과 죽음을 함께 한 찰떡 같은 우정을 보면서 새삼 놀란다. 동시에 그런 속에서 '서시'같은 명시가 탄생된 것을 감사하면서 잔잔한 행복감을 맛본다. '나에게도 그런 우정 하나 있었으면' 욕심과 함께.

                                                                                                     - 계간 상록수문학(2014.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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