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내 어린 시절의 삽화들

유소솔 2021. 1. 5. 00:18

- 광복과 건국 전 후

 

조국이 해방되기 직전인 1945년 4월 경, 6살이 된 나는 목포북교국민학교 강당에서 가슴에 명찰을 달고 아버지의 손을 잡고 줄 지어 둥그렇게 놓인 탁자들을 돌며 신입생 시험을 보던 생각이 난다. 이것이 나의 두 번째 어린 시절의 기억이다. 그 때 한 일본인 선생이 천연색 그림을 들고 이것이 무엇인가?”하고 일본말로 묻는 것 같았다. 보니 비행기여서, 나는 히꼬끼!”하고 대답했다. 그때가 태평양전쟁 막바지여서 자주 목포하늘에 비행기가 뜰 때마다 사람들이 , 히꼬끼!”하고 소리치던 것이 생각 난 것이다. 그랬더니 선생이 고개를 끄덕이고 웃으며 뭐라고 하자, 내 뒤에 서계신 아버지가 좋아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잘 했다'고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생각해보면, 한국인이 말을 빼앗기고, 일본 말을 잘한다고 칭찬했다니, 참으로 슬픈 시절이 아닐 수 없다.

 

학교에 입학한 후, 어느 조회시간에 반마다 일열 종대로 줄을 섰을 때 키가 작고 나이가 든 일본인 담임선생이 앞에서 줄을 살피다 다섯 번 째에 선 나를 향해 야나기 상!”하고 부르며 손으로 좀 들어가라는 시늉을 한 것이 기억난다. 야나기는 일본어로 버드나무인데, 우리 집 성씨가 버들 류()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그때 대개가 그렇겠지만 우리 가정도 일제의 황국신민(皇國臣民) 정책에 순응하여 창씨개명을 한 것 같아 나를 부끄럽게 한다.

 

그리고 얼마 후, 수업 중에 학교 사이렌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면 우리는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책상 밑으로 숨거나, 아니면 밖으로 뛰어나가 강당 뒤에 파 놓은 방공호 속으로 들어가자마자 두 손으로 눈과 귀를 꼭 막고 엎드리는 방공훈련을 했다. 그때 겨우 한 학기나 배웠을 일본어의 가다가라히다가라는 별로 생각나지 않고 잊어도 될 이런 전쟁놀음만이 기억되니, 나는 머리가 좋은 사람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그해 여름방학 때였다. 우리 집 앞 큰길로 많은 사람들이 무슨 깃발을 흔들고 '해방만세'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치면서 떼를 지어 지나갔다. 자주 보는 일장기가 아니었다.

내가 누구에게 저게 무슨 깃발이냐?”고 묻자, 모른다고 대답했다. 지금 생각하면

태극기인데, 40년 동안 식민지 백성으로 일제의 냉혹한 정치 때문에 독립투사

외는 대개 태극기를 한 번도 구경하지 못했으니 이를 어쩌랴. 이런 일이 나를 슬프게 한다.

 

그로부터 한 달 후쯤 일까. 보따리나 등짐을 진 꽤나 많은 일본인들이 네 줄로 길게 줄지어 울면서 우리 집 앞을 지나 선창을 향해 가는 것을 보았다. 전쟁에서 패한 일본인들이 자기네 집으로 쫓겨 가는 불쌍한 모습이었다. 그 중에는 내가 가끔 가서 사먹은 적이 있던 우리 옆집 아이스케이크 가게 주인의 가족도 있었고, 나와 나이가 비슷한 에이꼬도 보여 불쌍했다.

그를 본 순간 눈물을 글썽이다가 어른들에게 야단맞은 것이 생각난다. 국가나 이념보다 어린이만이 지닌 순수한 측은지심, 이것이 철없는 짓이라 할지라도 고귀한 것이 아닐까. 그런데 이를 못 마땅하게 여긴 당시 어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어 슬프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마침내 대한민국이 건국되어 우리는 학교에서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하는 노래를 음악시간에 배우면서, 어린 생각에도 일본과는 다른 우리나라가 새로 생겼다는 기쁜 생각이 문득 들어, “새나라 우리나라를 사랑해야지하고 다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새 나라는 아직 문제가 많아 중학생(당시 중학교 6년제)끼리 걸핏하면 서로 다투며, 친탁이니 반탁이니 하면서 서로 단체로 싸우다가 몇 사람이 피투성이가 되어 병원으로 갔다느니 하는 말을 형과 누나를 통해 자주 들었다. 그렇지만 왜 같은 동포, 같은 학생끼리 서로 그렇게 다투었는지 그 이유를 알기에는 내가 너무 어렸다. 그래서 좀 아쉬웠던 시절이다.

 

그로부터 얼마쯤 지났을까? 이른 새벽녘에 거리에서 벼락을 치는 듯한 총소리가 가끔 일어났다. 그럴 때마다 놀라며 잠에서 깬 우리 가족은 어떤 공포 속에서 이른 새벽의 어두움을 웅크리며 하얗게 새운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런 날 아침이면 학교에 가다가 길 한쪽에 불룩한 가마니에서 검붉은 핏물이 길에 흘러나오는 것을 목격하고, 흠칫 놀라 무서워서 멀리 돌아서 간 적이 몇 차례 있었던 기억이 난다. 이것은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 중의 하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때 감옥에 갇힌 공산분자들이 총으로 간수들을 죽이고 탈옥한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났는데, 탈옥한 공산분자들이 목포에까지 몰래 들어 온 것을 밤을 새워 수비하던 우리 경찰들에게 발각되어 도주하다 총에 맞아 죽은 시체들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들과 교전 중 죽은 우리의 경찰들도 있다는 말을 듣고 나는 당시 영암경찰서의 순경으로 있던 큰 형을 생각하며 교회에서 기도하던 일이 생각난다. 무엇 때문인지 동족끼리 서로 죽이고 죽여야 하는 현실을 이해할 수 없어 며칠 동안 슬픔에 잠겼던 기억이 새롭다

 

 

지금 생각해 보면, 거의 40년 간 나라를 빼앗기고 일본의 식민지로 살면서 고생했으나 일본을 무찌를 힘이 없는 것을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연합군들이 일본을 무찔러 우리나라가 해방된 것은 참으로 감사하다.

 또 해방된 지 3년 만에 대한민국이란 이름으로 건국하기까지에는 당시 공산분자들의 훼방이 많아 나라가 매우 혼란스러웠는데, 이를 잘 처리하여 나라를 안정시킨 지도자들이 장하다.

 

 그런데 건국한지 2년도 못 되어 북한 공산당이 불법으로 남침하여 나라가 위태할 때 우리 국군과 세계 16개국이 참여한 유엔군들이 많은 피를 흘려 나라를 지켰으며, 황폐화된 국토를 재건하고 땀 흘려 열심히 일해 지금은 세계 부강한 나라의 하나가 되어 가난한 세계 사람들을 돕는 나라로 성장한 것을 생각하니 건국 70주년을 맞아 감격스러운 눈물이 난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돌아보면, 어려울 때마다 보이지 않은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이 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 민족은 하나님의 은혜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되며, 신앙인들의 사랑의 봉사와 섬김을 통해 더욱 발전하는 자유민주주의의 국가로써 이 시대에 주어진 인류애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하며 더욱 힘쓸 것을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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