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의 감동 이야기

독립운동가 김응조의 심문과 답변

유소솔 2021. 2. 7. 00:20

김응조 목사(1896~1991)는 신학생 시절에 기미독립운동 선언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요,

민족주의자였다. 민족 대표 33인이 서울 종로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하자,

대기하고 있던 각 대학교 대표들 80명이 민족 대표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힘차게 불렀다. 김응조는 이날 성결교 경성성서학원의 대표로 참석하여 만세를 불렀다.

 

3.1만세운동을 계기로, 일제 조선총독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만세운동의 주동자 민족 대표들과 각 대학생 대표들을 체포하러 일경들이 전국을 샅샅이 뒤졌다. 김응조는 고향 경상도 영덕에 내려가서 고향의 유지들을 찾아가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설명하고 선동하려고 했으나 서울에서 미리 연락 받은 경찰들이 역에서 그를 알아보고 체포했다. 4월 15일이었다.

 

그러나 영덕에서도 그동안 서울 만세사건을 김응조가 유지 몇 사람에게 편지로 미리 연락을 했었기 때문에 김응조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다음 장날에 군민들이 장터에 모여 급조한 태극기들을 들고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비밀히 연락을 했다.

마침내 장날에 군민들이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혹시나 하고 장날을 대비하던 일경들이 출동해 총을 쏴 죄 없는 군민들이 수십 명 죽거나 부상당하고 강제로 해산되었다. 김응조는 미리 체포되어 군민 만세운동에 참여하지 못하고, 그해 9월 초 대구법정에서 1년 6개월 징역형을 받았다. 다음은 재판 때 판사의 심문과 김응조의 대답을 기록한 문서가 발견되어 여기 싣는다. 시퍼런 칼을 든 판사 앞에서 당당한 그의 모습을 보시라.

 

판사: 네가 독립운동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김응조: 독립은 인간양심의 욕구다. 노예와 독립, 어느 것을 원하느냐고 물으면 판사께서도 독립이라고 말 할 것이다.

판사: 일본과 조선이 합방으로 내선일체가 되었는데, 노예라는 말이 무슨 말인가?

김응조: 일조합방은 일본 제국주의의 강제 합방이지, 조선인의 의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판사: 조선이 독립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김응조: 일본의 역사는 2500년이요, 조선의 역사는 4500년이니 역사가 오랜 나     라가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판사: 왜 민중을 선동하는가?

김응조: 내가 민중을 선동하고 싶어도 못한 것은 서울에서 내려오자마자 나를 유치해둔 때문에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해       선동하지 못했다. 우리 군민들은 벌써 다음 장날에 독립 만세를 부르기로 작정을 했더라. 이는 누구 개인의 선동이 아     니라, 조선민족의 공통된 뜻으로 생각한다.

판사: 왜 관공서는 파괴하는가?

김응조: 그것은 내가 주재소에 구류되어 있는 동안에 된 일이니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것은 우리 군민들이 그만큼     일본의 식민정치를 싫어하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판사: 독립만세를 부른다고 독립이 될 줄로 생각하는가?

김응조: 우리의 만세소리는 일본의 총칼보다 더 강하기 때문에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사상은 반드시 조선에     서 성공할 줄로 나는 확신한다.

판사: 어림없는 소리......이만 신문을 끝낸다.

 

김응조는 그 후, 대구 형무소에서 모진 고문을 받는 1년 6개월 형기를 마친 후, 서울성서학원에 복교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나라 위해 전력을 다해 기도를 했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약한 민족으로는 독립이 어렵다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가 아침저녁으로 조국의 독립위해 기도하기 시작한 후 10년 만에 미영연합군에 의해 일본이 항복하고, 우리 조국은 해방되었으며, 3년 후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이 건국함으로 마침내 독립이 성취되었다.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당시 기독 성도들은 열심히 기도했던 것이다. 기도의 힘은 위대하였다.

 

 대한민국이 건국되자, 그는 서울신학교의 교수로 목사들을 양성하는데 온 힘을 다했다.

그러나 뜻이 있어 1961년부터 성결교신학교를 건립하여 학장으로 20여년간 목사들을 양성하다가 하늘나라로 간 애국자요 목사요, 교수요 학장으로 한국보수신학계의 거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