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의 감동 이야기

십자가의 길을 철저히 따른 신학생들

유소솔 2021. 2. 8. 22:26

 

1917년 10월 1일 경성성서학원에서 학생소요사태가 발생했다.

당시 세계1차대전이 유럽과 미국 일대에 전쟁으로 휩쓸어 그 영향도 대단하여 세계경제가 매우 어려울 때였다. 미국과 유럽교회의 신자들이 보내주는 선교비로 학원을 전적으로 운영하는 경성성서학원은 선교후원비가 갑자기 삭감되어 학교는 긴축운영을 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기숙사 학생들에게 공급하는 식사를 하루 3끼에서 2끼로 줄여 급식했는데, 식욕이 왕성한 신학생들이 하루 2끼로 산다는 것은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며칠 후 이에 불만을 품은 몇 사람이 선동하여 하루 3끼식 급식하지 않으면

동맹휴학하겠다면서 학생들이 학과수업을 거부, 강당에 모여 구호를 외치며 연좌시위를 했다.

 

당시 학원장 토마스 선교사와 교수들이 나타나, 학생들에게 학교재정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학교의 긴축운영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지만 학생들이 이를 거부하자, 학교에서는 교수회의의 결의에 따라 학생 전체에게 무기휴학을 단행했다.

이렇게 되자, 졸업반 학생들이 재학생들에게 눈물로 호소했다. 즉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의 십자가를 지기 위해 따르는 전도자들이다. 그런데 경제사정으로 3끼를 2끼로 줄였다고 이를 참지 못하고 반항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것도 참지 못하면 장차 이보다 더 고통스런 전도자의 길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이 호소에 감동받은 재학생들은 이구동성으로 몇 사람의 선동에 빠진 것을 뉘우치고 회개의 기도소리 높여 부르짖었고, 학생대표들을 뽑아 원장을 찾아가 사과를 드린 후 속히 개학할 것을 요청했다. 학교에서는 소요 주동자 2인을 퇴학시킨 후 개학하여 정상을 되찾았다. 이 사건은 당시 신학생들에게 큰 각성을 하게 했다.

  졸업반에 있던 학생들 중 강태집 학생은 이 사건을 통해 확고한 생활신조를 만들었고, 이것이 그의 목회자의 삶을 승리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것은 두 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철저히 믿을 것과 어떤 고난이라도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기쁘게 순종한다는 것, 즉 십자가를 지는 목회관 확립이었다.

 

그해 12월에 제6회 졸업생이 된 강태집은 당시 본부로부터 서울 무교동 전도관 부임(副任)전도사로 발령받았다. 그때는 성결교회의 초창기여서 외국선교사 감독에 의해 전도자의 교회 임명권과 사면권이 2년마다 행해지던 시절이었다.

그는 성결교회의 최초 발상지인 서울 무교동 전도관에서 주임 목사를 모시고 열심히 일한 결과 성적이 좋아 2년 후 충남 부여의 규암전도관 주임전도사로 전임했다. 규암전도관은 큰 교회로 그는 이곳에서도 열심히 일하여 이웃 석동리에 기도소를 개척하고 건축까지 하는 등 매우 성공적 목회를 했다. 1921년 전도관이  성결교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런데 2년 만에 갑자기 교회를 사임하라는 본부의 명령과 함께 후임교역자가 임명됐다. 그는 파직 당할 이유라도 알아야 하는데, 그걸 알 필요도 없이 명령에 따라 전격사임을 하고 가족을 이끌고 먼 마을 은산으로 이사했다. 이는 그를 모함하는 투서에 의한 것이었는데도 반항 한마디 없이 무임으로 어렵게 사는 그를 지켜본 본부에서는 2년 후 경북 군위교회 주임 전도사로 복직 임명했다. 그는 이곳에서 6년간 열심히 일하면서 비안교회. 성동교회를 개척하는 등 교회부흥을 시켰다.

 

그런데 1930년 본부에서 그를 경북 상주교회로 또 발령했다. 상주교회는 1년 전 신학생에 의해 개척된 곳으로

교인 4명이 교인집 한칸 방에서 모여 예배드리는 극히 미약한 기도처였다.

또 하루아침에 그는 극단적인 좌천을 당했으니 이를 어쩌랴?

그는 기도로 이겼으나 무엇보다 자녀들의 분노가 심해 목회를 그만 두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대가족을 모아놓고 “내가 목사된 것은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한 것 아니다.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신 명령 때문에 목사가 된 것이니, 아무 말 하지 말고 십자가를 지러 함께 가자” 하고 대가족을 달래서 이끌고 상주 기도원으로 갔다. 어쩌면 그의 헌신과 능력을 알기에 본부에서는 그를 약한 교회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그런 곳으로 계속 보낸 것이 아니었을까?

 

 그는 상주에서도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여 2년 후에 대지를 사서 교회와 사택을 지어 헌당함으로 교회가 나날이 부흥되어 교회 성장의 기틀을 철저히게 닦았다. 마침내 본부에서는 그를 성실한 목회자로 크게 인정하여 영남지역의 최대교회인 대구봉산동교회로 발령하고 영남의 작은교회들을 돌아보는 순회목사까지 겸하게 했다.  그는 본부의 명령이 곧 주님의 명령으로 생각하고 충성했다. 그의 십자가를 지는 목회 사역은 초창기 성결교회의 큰 버팀목이 되었으며, 모든 목회자들의 본보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