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의 감동 이야기

예수 믿고 상투 잘라 몰매 맞은 사람

유소솔 2021. 3. 7. 21:45

                                                                                           

 

                                        - 김상준 목사의 작은 이야기

 

한국성결교회를 창립한 주역의 한분인 김상준 목사는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1881년에 엄격한 유교가문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철저히 유교를 섬기며, 예절과 전통을 공부하면서 소년시절을 지냈다. 그는 전통 있는 의성 김씨 한 가문의 외아들이어서 어린 나이에도 한 달에 3번씩 생전에 보지도 못한 조상님의 제사에 끌려 다니며 억지로 절을 했다. 그러면서도 '죽은 조상들이 어떻게 자손에게 복을 줄까?" 하는 의문도 품었다.

 그가 20세가 되면서 가정의 대소사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22세가 되던 어느 날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수 백리 떨어진 평양에 처음으로 심부름을 갔다. 모처럼 처음 대도시 평양에 가기 위해 새 바지저고리에 상투를 곱게 틀고, 그 위에 나들이 말총갓을 멋 있게 쓰고 나섰다. 주소 하나들고 애써 찾아가 볼 일을 마치고 시내를 구경하기 위해큰 길로 나섰다.  큰 도시 평양 사람들 중에는 자기 처럼 상투머리를 한 사람들보다 서양식으로 상투를 자른 사람들이 많음을 보고 놀랐다.

 

그때 한 곳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어 가보니, 사거리 모퉁이에서 나팔 불고 북을 치면서 힘차게 노래 부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호기심으로 그곳에 가서 사람들과 함께 지켜보았다. 조금 지나자, 어떤 젊잖은 어른 한 분이 앞에 나와 연설했는데, 상투머리가 아니었다.

“ 여러분, 나는 오랫동안 가문의 규율에 따라 유학을 공부하고 유교를 신봉하던 뼈대가 있는 가문의 자손입니다. 그래서 한 달에 서너 번씩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고, 유교의 가르침 따라 힘을 다해 섬겼습니다. 종교를 믿으면 마음이 달라져야 하는데, 내 마음에는 조금도 기쁨이나 평화가 없어 습관 따라 억지로 하자니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같은 양반 자제인 친구를 따라 교회에 갔는데, 유교와는 전혀 다른 목사님 설교에 내 마음이 크게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이 평화로워졌습니다. ‘아, 이 기독교가 참 종교다!’ 하는 확신과 함께 손을 번쩍 들고 예수님을 믿겠다고 기쁨으로 소리쳤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날마다 기쁨과 평안과 소망 속에서 즐겁게 살고 있습니다. 자, 여러분. 어서 내가 믿는 예수님을 믿으세요. 그러면 나와 같이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평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자, 이제 나처럼 예수님 믿을 사람은 이 앞으로 나오세요!“ 했다.

 

 연설을 듣던 김상준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 분의 처지가 어쩌면 자기와 똑 같을 수 있을까? 그는 자기도 모르게 앞으로  나갔더니, 자기처럼 믿겠다는 십여 명과 함께 친절하게 안내 받아 어느 교회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목사님의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 하는 간단하면서도 중요한 말씀을 듣고 마음이 감동되어 신자로 스스로 등록을 했다.

그랬더니 목사님이 “이젠 우리는 하늘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 증거로 유교의 전통적 습관인 상투를 잘라버리는 결단을 해야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습니다.” 하시는 말씀에 보니, 목사님과 신자들이 모두 상투를 자르고 멋지고 시원한 머리를 하고 있었다.  옆방에는 예수 믿기로 결단한 남자들에게 상투를 잘라주고 있었다. 김상준도 그곳에 가서 상투를 잘라버리고 시원한 머리로 나왔다. 그리고 다시 굳게 결심했다.

“이제 나는 유교를 버리고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집에서 나를 쫓아낼지라도 결코 지면 안 된다. 오, 예수님. 나에게 힘을 주시옵소서!”하고 결심과 기도를 했다. 그리고 수 백리 떨어진 고향 길에 나섰지만 왠일인지 조금도 피곤하지 않고 힘 있게 걸어서 갔다.

 

그가 저녁 늦게 집으로 가서 아버지의 심부름을 잘 마쳤다고 말씀드리고, 저는 상투를 자르고 시원한 머리로 돌아왔다는  것까지 말씀드렸다. 갑작스런 그 말에 아버지가 어안이 벙벙하여 무슨 대꾸도 하지 못했다. 이제까지 자기의 말에 한번도 거역하지 않던 외아들이었기에 일단 참기로 했다. 당시 선각자들은 상투를 자른 사람들이어서 백성의 존경을 받았던 것이다.

 며칠 후, 증조할아버지 제삿날이어서 의성 가문들이 모여 제사를 위해 의논하는 자리에 그를 불렀다. 그는 가문의 종손이기에 안 갈 수 없어서 상투쟁이 어른들의 자리에 들어서자, 상투가 없는 것을 그글 보고 모두 놀랐다. 그는 사람들이 말하기 전에 먼저 말했다.

 

“저는 이제부터 예수교인이 되어 그 증거로 상투를 잘라버렸습니다. 또 복은 세상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지, 내가 얼굴도 보지 못한 먼 옛적 조상님들까지 매달 몇 차례 제사드리는 것은 헛된 일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저는 제사에 참가하지 않고 우리 가문에 하나님을 믿고 복을 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하고 선언해 버렸다.

 그러자 가문 어른들이 난리가 났다. 상투를 자른 것도 유교의 모독인데, 또 조상의 은덕으로 살기에 제사 드리는 것이 후손으로 마땅한 일인데 장손이란 자가 이를 거부한다면서, 그들은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그들이 집단 성토하며 협박했으나 그는 완강히 버텼다. 그들은 그에게 징계를 내려서 가문의 전통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결의 했다. 상준이 아버지도 할 수 없이 동의해야만 했다. 벌은 가문의 가장 큰 어른이 내리는 대로 하는 것이 조선시대 가문의 법이었다. 가문의 어른은 곰곰이 생각하더니,이네 하인들을 불렀다. 그들이 모이자 벌을 지시했다.

“저 상준이를 멍석말이해서 너희들이 돌아가며 힘껏 몽둥이로 쳐라. 벌은 30대다.”

                                                                                                                     

그 말에 하인들이 큰 멍석을 가지러 간 사이 상준이 아버지는 깜짝 놀라 치를 떨었다. 외아들

인데, 멍석말이 30대는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뼈가 부러져 죽거나, 운이 좋으면 살

지만 병신이 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가문의 법이어서 어쩔 수 없었다. 유교가문의 폭력이었다. 나라에서도 가문의 사형(私刑)은 인정하고 있었다.

 조금 지나 하인들이 들고 온 큰 멍석에 상준이를 누이고 똘똘 말은 후, 힘센 하이들이 돌아가며 힘껏 때렸다. “하나, 척! 둘, 척! 셋, 척! 넷, 척!......” 하인의 우두머리 청지기가 번호를 부르면 하인들이멍석을 둘러 서서 몽둥이로 쳤다. 어느새 어머니와 동생들, 집안 여자들이 와서 울고 있다가 나중에는 소리쳐 통곡하기도 했다.

 

  매질이 끝나자, 가문 어른들이 고개를 흔들며 집으로 돌아가면서 시체는 산에다 내버리라고 하인들에게 말했다. 저녁때에 하인들이 그의 시체를 버리려고 망석을 펴보니, 도련님이 아직 살아서 움직였다. 등이 터져서 피를 몹시 흘리고 있었는데, 다행히 등뼈가 부러지지 않았다. 청지기가 하인들에게 모두 입 다물게 하고, 자기 집으로 데려가서 한 달 동안 주인 몰래 한의사를 데리고 와서 침놓고 약을 먹이고 치료했다. 평소 상준 도련님이 하인들에게 잘해 주었기 때문이다. 상준이는 매를 맞으면서도 하나님께 울부짖어 기도했다고 한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살려만 주신다면 하나님과 예수님 위해 이 몸 바쳐 일하겠습니다.“

상준이 아버지는 외아들이지만 단념했고, 어머니는 밤새도록 울었다고 한다. 가문의 법을 어기고 죽으면 그 시체도 가문의 조상 무덤에 함께 묻히지 못하는 냉혹한 유교의 전통이어서 슬픔은 더했다. 청지기는 주인에게 아들은 산에다 그냥 묻었다고 보고했다.

 

아버지의 한숨과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한달동안 계속하던 어느 날, 아들이 멀쩡한 모습으로 안방에 불쑥 나타났다.

그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놀라서 자빠질 뻔했다. 무슨 유령을 본듯 했다. 죽었던 아들이 멀쩡히 살아 나타나 안방에서 부모님 앞에 엎드려 정중히 큰 절을 드리고 나서 말했다.

“사람들이 유교의 법으로 나를 매질하여 죽였으나,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나를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맹세했습니다. 이제 나는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났으니, 죽은 제사보다 부모님 살아계실 때 잘 모시겠습니다. 이것이 예수교의 도리입니다. 허락해 주시지요. 아버님.”

 

 부모는 더 이상 할 말이 있겠는가? 죽었던 외아들이 살아왔으니...살아만 있어도 가문을 이을 수 있는 것을. 마침내 아버지가 말씀했다.  “유교의 아들은 죽은 셈치고, 하나님이 살렸으니 네 마음대로 해라. 나는 간섭하지 않겠다.“

 그리하여 그는 매 주일마다 2십리 길을 걸어가 용강읍 교회에 나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그리고 예수 믿는 처녀를 교회에서 소개 받아 결혼하여 제사들 모두 폐지하고 그 대신 부모님께 온 마음을 다하여 내외가 정성껏 봉양하므로 부모들은 '죽은 제사보다 산 제사가 더 낫다'고 하면서 매우 기뻐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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