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의 감동 이야기

바보 의사 장기려 박사(2)

유소솔 2022. 3. 15. 00:04

 

 그는 무소유자로, 이웃과 모든 것 나누며 가난하게 살았다.

평생 집이나 재산을 소유하지 않고 무소유로 가난하게 살았다. 그의 삶의 목적은 나눔과 베풂이었다.

그는 성경에서 예수님 사랑의 삶을 통해 많은 어려운 사람들이 삶의 질곡에서 벗어나 빛을 찾은 것에

큰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주님을 평생 본 받아 살기로 작정했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나 청지기로 생각했다.

예수님의 말씀 따라 자신을 주인이나 소유주로 생각하지 않고 종이나 청지기로 여기며 살았다.

가난한 환자를 무료로 진료해주고 스스로 가난해져서 사람들의 삶을 부요하게 만들어 주는 것을 크리스천의

당연한 의무요 책임이라고 여겼다.

평양에서 국군 부상병을 치료하다 황급히 월남한 1951년 5월부터 부산에서 창고를 빌려 혼자서 간이병원을

설립했다. 그리고 전국에서 밀려든 가난한 피난민들과 전쟁부상자들을 무료로 진료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오늘의 부산 복음병원의 시작이었다.

 

 그의 삶의 철학은 사랑의 실천이었다.

사랑은 최고의 선이다. 사랑은 도덕의 도덕이요 생명의 생명이다. 사랑의 철학은 생명철학의 일대 혁명이다.

사랑은 아름다운 것, 사랑은 영원한 것, 사랑은 생명 자체다”고 스스로 정의했다.

이런 그의 사랑 실천의 삶은 사회에 강한 영향을 끼쳐 많은 사랑의 봉사자들이 나타났다.

이상규 고신대 교수는 “그의 생애와 삶은 한국교회 현장에 떨어진 거룩한 폭탄이었다”고 말했다.

그의 선한 영향력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사랑의 운동‘으로 계속 번져갔다. 그 하나가 '한국누가회'의 탄생이다.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 의사의 이름을 딴 '한국누가회'는 크리스천 의사들의 모임으로, 평소 자기 직장인 병원에서

진료하다 1년에 한번씩 외국 가난한 나라를 찾아 몇 팀씩 한달 동안 무료 진료하고 돌아온다. 지금도.

 

 그런데 그가 어떻게 황급히 국군과 함께 단신 월남하게 되었을까?

1950년 10월 평양을 탈환한 국군을 환영한 그는 12월 초 평양의대병원 2층 수술실에서 밤새워 가며 부상당한

국군 장병들을 수술하고 있을 때였다. 곧 통일의 기쁨을 기대하는 그들에게 중공군이 평양에 침입했다는 보도를

접하자마자, 갑자기 폭탄이 병원 3층에 떨어져 아수라장 속에 아군은 재빨리 철수해야만 했다.

 

 그는 아내를 그리는 ‘순애보’의 주인공이었다.

국군과 함께 황급히 철수하는 바람에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생이별을 해야만 했다. 일평생 빛 바랜 가족사진 한 장을

늘 가슴에 품고 아내를 그리워하며 살았다. 휴전이 되고 갈수록 통일의 꿈이 어렵게 되자 지인들이 그에게 재혼을 권

할 때마다 그의 대답은 이랬다.

"한 번 사랑은 영원한 사랑이다. 나는 한 여인만을 사랑하기로 이미 약속을 했다. 내가 평양에서 결혼할 때 주례하시는 목사님이 우리 부부를 앞에 세워놓고 '두 사람은 백년해로하라.' 고 하실 때 나는 "예"하고 대답했다.  그러니 재혼하

는 것은 백년 뒤에나 생각해 볼 일이다. 나는 사랑하는 나의 아내와 영원히 살기 위해서 이 땅에서는 혼자 살겠다!"

 

 그는 주님 섬기며 살다간 '주님의 사람'이었다.

그는 평생 아내를 그리다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아내에 대한 그의 극진한 사랑은 육체나 환경을 초월한 영원한 사랑이 되었다. 그의 부부는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났으리라.

"내가 죽거든 나의 비문에 '님 섬기며 살다간 사람'이라고만 적어 달라" 고 유언을 남겼다.

 

그의 죽음 후, 국가는 최고훈장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그에게 수여했으나, 그의 생존 시에는 동양의 노벨평화상이라는 ’막사이사이상‘을 이미 받은 바 있는 참 애국자요, 참 예수님의 제자요, 참 하늘나라의 백성이었다.

'바보 의사 장기려 박사', 우리 민족 누구에게나 닮고 싶은 그런 하나님의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