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의 감동 이야기

바보 의사 장기려 박사(1)

유소솔 2022. 3. 11. 00:03

 

“이 환자에게 닭 두 마리 을 내주시오.”

이것은 잘 먹어야 하는 환자에게 써준 바보 병원장의 처방전이다.

“제가 밤에 뒷문을 열어 놓을 테니 어서 집으로 그냥 가세요”

어느 가난한 분이 퇴원할 때 돈이 없어 울고 있을 때 그 사실을 눈치 채고

병원 뒷문으로 몰래 빠져 나가게 해 준 것도 바보 병원장의 짓이다.

 

이 바보 의사가 바로 장기려(張基呂) 박사다.

장기려 박사가 1995년 12월25일 성탄절 새벽 1시45분 85세로 하나님의 품에 안기셨다.

한국의 언론은 ‘한국의 슈바이처’ 또는 ‘살아있는 작은 예수’가 우리 곁을 떠났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어두운 밤과 같은 시대에 빛을 비추며 주님과 병든 사람들을 섬기면서 겸손했고,

스스로 가난하면서 남을 따뜻하게 보살펴 준 은인이었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의료보험의 선구자였다.

그는 1968년 당시 100원하는 담뱃값만도 못한 월 보험료 60원에 ‘청십자 의료보험조합’ 설립했다.

이는 국가보다 10년 앞선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의료보험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큰은혜를 베풀었다.

그는 65세 퇴직 후, 85세 소천할 때까지 무의촌 진료를 다녔다. 서울대, 부산대 의대교수, 부산 복음병원의

원장을 지냈지만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자기 소유의 집 하나 없었다. 학교나 병원의 관사에서 살았고,

자신의 소유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다.

 

지성인이 ‘바보‘라는 말을 들으면 그는 삶의 승리자라 할 수 있다.

당시 그만한 의료기술을 지닌 의사면 모두 부자로 살았다. 그러나 그는 달랐다.

그는 이웃과 나누며 가난하게 살았다. 그가 먹는 음식은 병원에서 의료진에게 제공하는 간단한 몇 가지 음식뿐이다.

그것으로 만족하면서 늘 감사하며 살았다.

바보라는 말을 들으면 내 인생은 성공한 것이다. 인생의 진정한 승리사랑하는 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한국인 유일한 일본 나고야 의대 의학박사였다.

그는 1911년 일제 강점기 때 평북 용천에서 출생하였다. 당시 천재만이 다닐 수 있는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그리고 평양도립병원 의사로 재직 중 일본 나고야의대 대학원에 유학하여 박사학위(1943) 받았다.

그는 광복 후 평소 존경하는 조만식 장로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의 신앙사랑으로 실천할 수 있도록 기도했다.

1947년 김일성대학 의과대학 교수 겸 부속병원 외과과장으로 부임할 때 그는 ‘주일에는 일할 수 없다’는 조건으로

부임했고, 환자를 수술할 때는 항상 먼저 기도하고 시작했다.

 

그는 삶의 목표가 ‘예수를 본 받고 섬기자’였다.

그의 수술을 통해 죽을 병 환자들이 살아서 그에게 감사했다. 그 때마다 “우리 하나님이 나를 통해 고쳐주셨으니

감사하나님께 하세요하고 전도했다. 이처럼 그는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거나 칭송 받기를 싫어했고,

오직 하나님을 높이고 섬기기를 좋아하는 겸손하고 진실한 성도였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