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나치이즘과 사무라이즘

유소솔 2021. 1. 13. 00:41

어떤 사람이 어느 누구에게 옷 한 벌을 샀다. 집에 와서 입어보니 아주 좋아서 기분이 좋았다.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뜻 밖에 보석 한 개가 나왔다. 그는 고민을 했다. 재수가 좋았으니 그냥 가질까? 아니면, 양심에 거리끼니 주인에게 보석을 돌려줄까?

그는 랍비를 찾아가 고민을 털어 놓았다. 랍비는 당신은 옷만 샀지, 보석까지는 사지 않았으니, 보석은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으냐?” “. 그렇게 하겠습니다.” “돌려줄 때 반드시 아들을 데리고 가라.” 그리하여 그 사람은 아들을 데리고 가서, 사연을 말하고 보석을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이것을 목도한 아들은, 반드시 정직하게 살아야한다는 교훈을 배웠고, 아버지를 존경하게 되어 대대로 정직한 가문을 형성했다. 유대인 탈무드의 얘기다.

 

최근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북아 일대의 국가마다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한 반발로 연일 뜨거운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일본이 과거 한국과 아시아 여러 나라를 침략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살상하고 심지어 어린 소녀 수백명에게  돈벌이 할 수 있다는 말로 꾀어 일본군의 위안부로 삼는 등 막대한 피해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반성은커녕, 소위 대동아(大東亞)를 주도한 선진국으로서 후진국들의 발전에 공헌했다는 식으로 기술한 중고교 역사교과서를 검정에 통과시켰기 때문이다.

 일본 문부성이 `새 역사교과서의 모임`등 우국주의자들이 집필한 교과서를 검정에서 통과시킨 사실은, 과거 일본이 아시아 각국에 피해를 끼친 군국주의의 황국사관(皇國史觀)을 인정했다는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곧 군국주의의 부활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과거 군주시대에는 국가마다 영토확장을 위해 전쟁이란 수단을 통해 인접 국가들을 침략, 무수한 인명을 살상하는 등 세계는 전쟁이 없는 날이 하루도 없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제 민주국가로써 침략국의 과거에 대한 반성여하에 따라 그 국가에 대한 세계사의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예로, 세계 제2차대전의 전범국인 독일은 전쟁이 끝난 후 나치일당이 저지른 범죄임에도 국가적으로 철저히 반성했고, 피해국들에 대한 배상에 최선을 다했다. 특히 1970년 서독 수상 빌리 브란테는 폴란드 유대인 학살 묘소에 가서 유대인의 학살에 대해 심심한 사죄를 한 후,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철저히 변상할 뿐 아니라 청소년 역사교과서마다 나치스가 저질은 범죄행위를 낱낱이 기술하고 규탄하여 후세들이 다시는 인류에 대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엄하게 경계하고 있다. 그러기에 독일은 과거 피해국가들의 비난을 받지 않고, 함께 유럽연방(EU)이라는 이상향을 주도하면서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다.

 

이에 비해 같은 전범국인 일본은 어떤가. 종전이 된지 반세기가 넘도록 피해국들에게 사죄는커녕 일본 국왕이 와서 겨우 한다는 소리가 통석하게 여긴다는 정도였으니 한심하다. 통석은 '애통스럽게 여긴다'는 뜻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들은 이웃나라 침략과 점령을 해외진출로 미화한 후, 오히려 아시아 각국을 해방시키고 발전시킨 공로자라고 강변하는 철면피 모습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같은 전범국인 독일과 일본 입장의 큰 차이는 왜 이렇게 다를까?

 

미국의 신학자 리차드 니버(R. Niebuhr)는 동서양 문화의 핵심을 서구는 죄의 문화로, 동양은 수치의 문화로 지적해서 유명하다.  즉 기독교 죄의 의식이 서구문화를 선진문화로 일궈냈지만, 기독교적 죄의 개념이 없는 동양, 특히 일본은 2차대전의 죄악을 인식하지 못하고, 싸움에 지면 수치스러워 자살하는 소위 사무라이문화에 젖어 있다. 나치즘에는 죄 의식이 있지만, 사무라이즘에는 죄 의식이 없다. 이는 민족적 자존심 문제이기 전에 정직성, 윤리의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왜곡된 역사교과서를 배운 일본의 청소년들이 사이비 민족적 우월의식으로 무장하여 언제 또다시 인류평화를 깨뜨리는 범죄국가로 나타나게 될런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저들에 대한 감정적 대응보다 죄의식을 깨우치는 선교적 차원에서 대처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아시아와 인류의 평화를 위해 우리가 일본 복음화에 깊은 관심을 기우려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크리스천 한국신문(2004. 10. 13)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평화의 전도사 지미 카터  (0) 2021.01.22
도박, 이 망국 병을 왜 허락했는가  (0) 2021.01.19
911 테러와 십승지  (0) 2021.01.06
하나님의 뜻과 죽음 훈련  (0) 2021.01.01
6승 1패와 5승 3패  (0) 2020.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