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의 감동 이야기

목사 같은 판사 문기선 장로 2.

유소솔 2021. 10. 20. 00:02

 

 

조국이 해방되었으나 승리한 우방국의 각서에 따라 한반도는 38선을 기준으로 분단되었다.

북에는 소련군이. 남쪽에는 미군이 당분간 주둔하여 신탁통치를 맡게 되었다. 미군은 3권 분립으로 국가를 운영하는 민주주의 국가이므로 하지 중장을 대표로 4천명의 장교들이 와서 행정과 사법을 장악하여 요인들을 군 단위 이상 각 지역에 배치하여 백성들의 민원을 처리하는 등 봉사를 통해 우리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쳤다.

 

그러나 북한은 소련군이 점령하고 공산주의 국가로 만들기에 힘을 쏟았다.

그들은 당시 소련군 대위 김성주를 꼭두각시로 임명하자, 그는 유명한 독립군 대장 고 김일성 장군의 이름을 도명하여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공산주의 국가를 세워갔다. 북한 사람들은 김성주는 모르지만 고 김일성 장군의 얘기를 전설처럼 들었기에 처음에는 속았으나, 나이가 겨우 33세 풋내기여서 지식인들은 거짓인 줄 알았으나 협박에 응해야 했다.

 

인민위원회는 공산주의 사회 건설에 가장 거침돌이 기독교인 것을 알았다.

그들은 주일 예배를 방해하기 위해 오전 9시에 각 지역마다 모여 토목공사를 강제로 동원하고 불참자는 처벌했다. 그래서 기독교가 왕성한 평안도와 함경도, 황해도 신자들이 신앙의 자유을 찾아 정든 고향을 떠나 38선을 목숨 걸고 대거 월남하였다. 문기선 변호사도 이런 상황을 미리 알고 북간도에서 인천으로 귀국했다.

 

남한의 정부수립하기 전 3년 간 신탁통치를 위해 미군은 민주적인 사법권을 먼저 확립했다. 

우선 사회의 안녕을 위한 사법권의 강화를 위해 일제 시 법관 자격자들을 찾아 그들을 적시적재에 임명하여 혼란한 치안문제를 해결토록 했다. 그때 책임자로 임명된 분이 후에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이 된 김병로 변호사였다.

김병로 변호사로부터 발탁된 문기선 변호사는 그의 경력에 따라 1945년부터 10여년 간 각처의 법원장으로 근무하며 최선을 다했다. 그는 정부수립 이전의 남로당 사건과 1948년 대한민국 국가수립과 6.25 전쟁 등 혼란 속에서도 국가민족을 위해 정의와 신앙양심 바탕으로 대쪽 같은 판결을 통해 사회를 정화하는데 온 힘을 기우렸다.

 

새 국가 사법권의 기강이 흔들리면 국가의 혼란이 야기 된다는 것이 김 대법원장의 소신이다.

문 원장도 뜻이 같았다. 그래서 그가 부임하는 곳마다 부임인사를 통해 법관들이 먼저 법대로 소신껏 하는 것이 준법이고, 우리의 민주주의 초석을 다지는 것이며, 하나님의 공의를 이 땅에 실현하는 길이다하고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그의 얼굴은 시퍼런 대쪽처럼 정의의 서릿발이 서리는 형상이어서,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6.25전쟁 후, 황폐된 국가를 일으키기 위해 국민들의 고난의 삶이 시작되었다.

자유당이 계속 집권하기 위해서는 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집권이 필요해 당 차원에서 모든 수단방법을 총동원하므로 타락했다. 이런 정치적 상황에서는 3권분립이라도 법관이 소신을 지키기가 참 어려운 현실에서 문기선은 사법권 수호를 위한 절대 필요한 존재였다. 그의 법관 재직 시 주요한 사건처리마다 신문이 대서특필할 정도로 그는 유명했다.

 

그중 청주지법원장 재직 시 태극도 교주의 자유당 매표행위에 대한 야당의 고발 사건이었다.

태극도는 사이비종교로 자유당의 종교 매수작전의 하나로 교주를 절대시한 사이비였다. 그러나 정치가 개입된 사건은 판사들이 가급적 맡지 않으려고 하자, 문 지법원장이 본을 보이기 위해 직접 나섰다.

문 원장은 기독교 신자의 입장에서 태극도를 사이비종교로 정치에 개입한 종교타락의 표본으로 판결하여 교주를 중형에 처하였다. 자유당 망신이었지만, 자유당은 청렴결백한 김병로 원장 때문에 감히 대법원 항소를 포기했다.

 

1950년대 후반 총선 표 개입과 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은 장기집권을 위해 결사적으로 부정 선거를 획책했다.

그래서 돈과 지위와 명예와 깡패까지 총동원한 부정부패로 횡포가 극심했다. 그 결과 야당이 고발하면 법관들이 정부 눈치를 보느라 적당히 봐주는 사태가 빈번하게 일어나 법관 불신임 사태를 야당 신문에서 크게 제기했으나 여당 신문은 오히려 정부를 두둔했다. 그래서 나라는 매일 시끄러웠고 어지러웠다. 마침내 4, 19 부정선거 규탄이 전국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