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의 감동 이야기

대통령 부름을 거절한 최석모 목사

유소솔 2021. 11. 13. 00:03

 

 

최석모 목사(1890~1950)는 성결교회 초창기부터 6.25 전쟁 때까지 교회를 발전시킨 공로자였다.

그는 서울에서 출생하여 보성학교, 한성영어학원을 졸업한 당시 몇 되지 않은 영어에 능숙한 지성인이었다.

서재필이승만이 이끈 독립협회가 조선 왕 고종에 의해 해산되고 간부들이 종신 징역형을 받았다. 이승만은 감옥에서 성경을 읽고 신자된 후 7년 만에 석방되자, 세계는 미국의 시대임을 깨닫고 한성영어학원에 입학했을 때 최석모도 입학해 15살 차이지만 이승만을 형님처럼 그의 지도력에 따른 온건한 협력자였다.

 

당시 상동감리교회 청년으로 미국 세계감리교회 청년대회에 한국대표로 선발되어 출국한 이승만은 미국에서 계속 머물며 교포들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하다 1919년 삼일만세운동이 미국 신문에 보도되자, 중국으로 망명한 분들과 협의하여 그해 4월 15일에 ‘대한민국’이란 이름으로 상해망명정부를 조직하고 임시 초대 대통령에 선출된다. 그는 미국에서 대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6년만에 획득한 천재성을 발휘하며 계속 세계적으로 대한의 독립운동에 헌신했으며, 최석모는 망하지 않은 영원한 하늘나라를 위해 서울성서학원에 입학했다.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로 조국이 광복을 맞아, 1948년에 대한민국이 건국되어 제헌의원들을 선출, 법에 따라 이승만 박사가 초대 대통령에 당선, 취임했다.  그는 친일분자들을 징계하는 법을 만들어 일단 모두 구속했으나 새 나라에 지도자들을 확보하려다 보니, 행정경험이 있는 사람은 별로 없고, 거의 친일파들뿐이어서 어쩔 수 없이 모두 석방하고 그들 중 선별해서 주요요직을 채웠다.

                                                                                                                 

할 일은 많고 인재의 부족을 한탄하던 이 박사는 영어를 잘 하고 사상이 온전한 사람을 찾던 중 문득 과거 한성영어학원에서 함께 공부한 최석모가 생각났다. 그러나 이박사는 이름과 목사가 되었을 것이란 추측만으로 비서에게 전국 교회를 샅샅히 찾아서 승낙 받아 오라고 했다. 당시 최석모 목사는 서울 아현성결교회 담임목사로 일제 말기에는 6개월 모진 수감생활도 한 애국지사였다.

 

어느 날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대통령의 서신을 가지고 왔다. 내용은 새로 시작할 정부의 기관지 서울신문을 창립할 예정이니 서울신문의 사장 직을 맡아달라며, 나중에는 장관도 시켜 줄테니 새나라의 국가발전에 헌신해 달라는 부탁이 있었다. 얼마나 큰 행운인가? 그러나 최석모 목사는 곧 답장을 써서 비서실장에게 보냈다. 그 글은 간략했다.

 

나는 이미 하늘나라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나는 오직 목양일념(牧羊一念)입니다. 이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약속입니다.지극히 간단한 내용이었다. 당시 목회를 하다 정치계에 몸을 던지기 위해 국회의원에 출마한 목사들도 많았지만, 최석모 목사는 그들과는 전연 달랐다.

 

그러나 국가 수립 2년도 안 되어 북한이 6.25 전쟁을 일으켜 남침했을 때 이를 예견치 못한 한국정부가 3일만에 서울을 빼앗기고 계속 후퇴하다가 임시 수도를 부산으로 정해 낙동강을 최후 전선으로 유엔군이 참전하여 도와주므로 3개월 동안 한국의 8/10 지역이 적군에게 넘어가 공산치하 세상이 되는 비극이 있었다.

8월 23일 임시 공산당 본부에서는 피란가지 못하고 신자들을 지킨 큰 교회 목사체포명령을 내려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등 유명 목사들의 명단과 주소를 확보하고 하루 동안에 약 60 여명을 체포했는데, 6명의 성결교 목사 중 최석모 목사도 있었다.

 

그들은 체포한 목사들을 포승줄로 결박하고 강제로 북쪽으로 걸어서 10월에 평북 강계에 까지 끌려가 허름한 창고에 가두고 끼니마다 주먹밥 하나씩 주었다. 북조선 어용목사들이 찾아와서 귀순하면 살려준다고 회유 했으나 “이 가롯유다 같은 배신자!라고 호통을 치고, 모두 죽으면 죽으리라라 각오하고 맞서 기도하다가 모두 순교 당했다.

이런 사실은 당시 종교인사 납치담당 책임자인 조철 씨가 1962년에 탈북하여 한국에 귀순한 후, 동아일보에 연재된 종교인 납치에 대한 글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왜 북한 공산당은 한국기독교 거물급 지도자들을 납북拉北 했을까?

그들은 공산당의 적인 한국의 기독교를 말살하려면 거물급 지도자들을 납북해서 귀순하도록 강제로 회유한 후, 이를 기독교 말살 선전용으로 이용하면 한국의 기독교는 끝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순교자들의 를 먼저 보셨기 셨기 때문에 한국의 기독교는 그 후 1970년부터 20년 간 1천만 신자로 크게 부흥하였던 것이다.

최석모 목사, 그는 세속정치의 유혹을 거절한 인자하고 겸손하신 예수님 닮은 참 제자, 거룩한 밀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