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아침의 단상

삼일정신으로 새롭게 성장하는 교회

유소솔 2022. 2. 27. 00:03

 

이번 주간에 삼일절이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3년 전 1919년, 일본의 강점에 항거하여 일어난 만세운동이 있었습니다.

전국적으로 일어난 삼일만세 운동으로 말미암아 당장 독립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많은 백성들이 죽거나 수감되어 큰 고통 받았지만, 이는 민족적 자유를 부르짖은 대 사명이었습니다.

 

만일 ‘삼일만세운동’ 없이 우리에게 독립이 주어졌다면 우리는 얼마나 부끄러웠을까요?

김동호 목사의 표현대로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것 보다 더 무모해 보였던 삼일운동. 던지면 깨지고 던지면 깨지고 깨져도 던지고 깨져도 또 던지고....참으로 훌륭한 조상을 가졌다. 자랑스런 조상을 우리는 가졌다고 했습니다. 

당시 세계는 우리 민족이 총 궐기한 심일만세운동 소식에 놀라며, 불의에 저항하는 우수한 민족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초창기에도 이런 인식이 백성들에게 각인되었습니다.

19세기 말, 이 땅에 복음이 시작되면서 교회는 대사회적 이미지가 좋았던 교회였습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하면 애국적이고 선구자적인 사회의 지도자라는 이미지가 있었습니다. 한로, 당시 여신자들은 흰 저고리에 검정치마를 입고 한글을 모르는 부녀자들에게 야학을 열어 글을 가르치고 애국심 가르치는데 앞장섰습니다.

 

또한 당시 신자들은 모두 정직하고 할 것이라는 인식이 백성들 사이에 있었습니다.

한국교회는 예배당을 짓기 전에 먼저 학교병원을 지어 무료로 가르치고 서양식 의료기술로 치료했습니다.

나라가 일본에 을 져 정치적 이전에 먼저 경제적 속국이 되어가게 될 때였습니다. 조만식 장로를 비롯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국채보상운동을 전국적으로 일으켜 애국애족운동을 이끌어 내기도 했습니다.

 

그 후 일본의 음험한 야욕으로 조선이 망하고 한일합병되는 절망의 때가 왔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절망하지 않고 영원한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앞장서서 자유를 부르짖는 3.1 만세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기독교 애국지사들이 희생을 당했지만,  백성들은 크리스천 하면 애국자라는 등식이 성립되리만큼 우리 초기의 한국 기독교는 좋은 대 사회적인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선교사가 처음 입국했을 때는 학교 교사의 신분으로만 허락되었기에 복음전파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신식 교육을 위해 많은 학교 병원을 세워 무료 교육과 치료를 통해 백성들에게 많은 혜택을 베풀었습니다.

이에 감동 받은 고종 임금이 마침내 선교사 입국 2년 반만에 교회설립을 허락했습니다.

그후 복음이 이 땅에 성공적으로 뿌리내리고 세계 선교사상 그 유례를 볼 수 없이 부흥하고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와 뿌리내린 이후 요즘처럼 교회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이 나빴던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우리의 교회가 세상과 사회에 대한 책임에 등한히 하고, 오직 교회만 성장시키는데 급급했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이제 교회는 민족과 함께 하는 삼일정신을 시급히 회복해야 합니다.

(임채영 목사, 서부성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