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의 감동 이야기

성결교회 첫 여전도사

유소솔 2021. 1. 18. 22:02

성결교회 최초의 여전도사는 박기반(朴基盤)이다.

그녀는 1887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1910년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서울 무교동전도관의 전도사로 부임했다. 1907년 최초로 세운 복음전도관이 무교동 전도관이었는데, 1921년에야 성결교회라는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그녀는 성결교회 역사상 최초의 여전도사였고, 교회에 부인회를 처음으로 창설해 부인성도들을 신앙으로 훈련시켜 교회에 봉사하고 전도하게 하는 서울부인연합회를 조직하여 첫 회장으로 여성지도자의 명예를 안았다. 그가 이렇게 되기까지는 남모르는 고민과 쉽지만은 않은 두 가지의 큰 결단이 있어야 했다.

 

하나는, 감리교인으로 성결교인이 되기로 결단한 것이다.

박 씨 집안의 무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으나 어려서 부친을 병으로 잃었다. 다행히 감리교의 루이스 여선교사의 전도를 받은 어머니를 따라 동대문감리교회의 교인이 되었다. 그 후 어머니가 이화학당의 기숙사 사감이 되면서 두 딸은 이화학당에 입학하였다.

박기반이 5학년 졸업반이던 1907년 6월 초순 경, 어머니와 함께 종로 거리를 지나다가 북을 치고 찬송하는 노방 전도대를 만났다. 일본 유학에서 갓 돌아와 종로에 복음전도관을 세운 정빈, 김상준 두 전도사가 이끄는 전도대였는데, 그들이 왜치는 뜨거운 전도설교를 듣는 순간, 박기반의 가슴이 물결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매주일 교회나 학교의 예배에서 듣던 설교와는 달랐다.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기 때문에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설교였다. 예수님도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는데, 예수님을 믿고 있던 그녀는 자신이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이튿날 혼자서 종로의 전도관을 찾아간 그녀에게 두 전도사는 복음의 핵심인 중생과 성결을 설명하면서, 중생하기 위해 먼저 회개할 것을 촉구했다. 그 순간 그녀는 마음이 떨려오면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쏟으며 회개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두 전도사의 지도로 중생(거듭남)을 체험했다. 그 순간, 그녀의 마음에 감사와 평화, 그리고 기쁨이 가득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새 사람이 된 것이다.

그녀는 이곳이 바른 성경을 가르치는 참 교회임을 깨닫고 교회를 옮길 것을 결심했다. 처음에는 어머니가 반대했으나 딸의 변화된 삶에 놀랐고, 또 결심이 굳센 것을 보고 마침내 허락하므로 박기반은 감리교회를 떠나 성결교회의 신자가 될 수 있었다.

 

또 하나는, 교역자가 되기 위해 동경 유학을 결단한 것이다.

그녀의 생활은 은혜가 충만한 삶의 연속이었다. 가정에서는 물론 매일 학교에서도 기도하고 찬송을 했고, 수업을 마치면 전도관에 와서 새신자 성경 공부 반에서 배우고, 혼자 간절하게 기도하고 찬송을 한 후 집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설교를 듣거나 혼자서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종으로 헌신하라는 부르심을 계속 받았다.

 

당시 여성이 교역자로 헌신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직 개화기이기에 유교의 여성차별이 남녀의 의식속에 잠재된 시기였으나 그녀는 순종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정빈 담임 전도사와 상담했는데, 정 전도사는 기뻐하며 모교인 동경성서학원을 추천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두 가지의 벽을 넘어야만 했다. 하나는 어머니의 허락인데, 역시나 반대했다가 딸의 간청과 금식기도에 매달리는 것을 보고 사흘만에 허락하고 말았다. 또 하나는 학교의 반대였다. 해마다 졸업생 중 우수한 한 사람을 미국에 유학시켜 모교의 교수로 확보하는 계획에 그녀가 선정되었다면서 이화학당에서 반대한 것이다.

 

미국 유학이냐? 일본 유학이냐? 또는 교수냐? 전도사냐? 하는 문제를 놓고 그녀는 금식기도로 매달렸는데, 사흘만에 응답을 받았다. 그녀는 편안함을 버리고 고난을 택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마침내 그녀는 1907년 가을에 동경성서학원에 입학하여 3년만에 졸업하고 귀국하여 무교동전도관 여전도사로 당당히 발령 받아 부임하므로, 성결교회 역사상 최초의 여 전도사가 되었다.

 

당시는 유교의 '남녀유별' 사상이 백성들에게 남아 있어서 부인 신자들은 두 남자 전도사에게 일이 생겨도 감히 상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여자 전도사가 왔으니 부인신자들은 좋아서 마음 놓고 상담하므로 신앙이 날로 향상할 수 있었다. 교회마다 여전도사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그녀는 전도사로써 부인 신자들의 가정심방을 통해 신앙을 가르치거나 권면하고 기도해주면 믿음 약한 신자들이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어 보람을 느꼈다. 교회는 날로 부흥되었다. 그녀는 얼마 후 전도관 안에 부인회를 조직하여, 힘을 모아 성미운동과 전도와 봉사활동을 통해 교회 성장에 활기를 불어 넣었으며, 또 서울의 다른 전도관의 부인들을 만나 부인회를 각각 조직하도록 권면하여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목회활동을 돕고, 전도와 봉사를 하게 하여 오늘의 교회에 없어서는 안될 크게 활동하는 여전도회의 기반을 굳게 닦았다.

 

또 그녀는 한 교회만 아니라 서울 각 전도관들의 부인회장들을 만나 첫 경성(서울)부인연합회를 조직, 회장이 되어 힘을 모아 전도와 봉사활동을 통해 교단 발전하는데 앞장을 섰다. 이 조직이 점점 확대되어 각 지방연합회가 되고, 후에는 전국여전도회연합회가 되어 교단의 발전에 앞장 서서 활동하는 믿음의 여성들이 되게 하는데 그 기반을 닦았다.

그녀는 1934년에 여성도의 신앙교양을 위해 첫 월간 '기쁜소식'을 발간하여, 일제에 의해 교단이 해산되기까지 전국 여성도들의 신앙과 봉사의 능력을 개발하는 기반을 닦기도 했다.

 

그녀는 후에 역시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한 배선표 목사와 결혼하여 전도사 겸 사모로 지혜롭게 능력있게 교회를 섬겼으며, 그녀의 이름처럼 초기 성결교회의 발전에 큰 기반을 조성한 인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