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성탄절과 마구간 신앙

유소솔 2021. 1. 30. 22:34

 최근 우리나라에 호적법이 많이 바뀌어졌다. 그 중에 출생지를 정확하게 현실화하는 법이 새로 등장했다. 즉 전에는 아이가 병원에서 출생했더라도 출생지는 그 부모가 사는 집의 주소로 등록했었다. 그런데 요즘 바뀐 법에 의하면, 아이가 병원에서 태어 낳으면 00시 00동의 00병원이라고 출생지를 등록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호적법에 따른다면, 예수님의 출생지는 이스라엘 베들레헴의 어느 마굿간이 될 것이다.

문제는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더럽고 천한 마구간에서 지극히 초라한 모습으로 탄생

할 수 있었을까? 사람마다 의구심을 품지만, 여기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석가모니는 인도 가비라 성주의 아들로 호화로운 왕궁에서 출생했고, 마호메트는 아라비아 메카에서 유복자로 안방에서 태어났다. 그들에 비해 예수는 이름도 모르는 사람의 초라한 마구간에서 탄생했다. 성경에는 당시 로마황제의 호적령에 따라 나사렛에서 살던 마리아 부부가 남편 본적지인 베들레헴으로 만삭된 몸인 마리아를 나귀에 태워 갔지만, 베들레헴에 본적을 둔 많은 사람들이 호적하러 왔기 때문에 여관마다 만원이었다. 요셉과 마리아는 할 수 없이 어느 마구간에 들어가서 아기를 탄생시킬 수밖에 없었다.

 

예수는 성장하여 공생애 3년 간 집 한 칸 없이 제자들과 떠돌이 생활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몰려오는 수많은 병자들을 다 치유하셨으며, 수만 명의 굶는 백성들을 한 어린이가 드린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가 담긴 도시락을 축복하여 그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주라, 그러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 6: 38)고 가르치셨다. 교회는 구제하는 곧동체라고...

 

 마침내 그리스도는 인류를 대속하는 십자가 죽음으로 물과 피를 아낌없이 쏟아 주심으로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활짝 여셨다. 예수는 출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마구간의 삶이었고, 이를 그는 ‘십자가의 삶’으로 표현하여 참 제자의 도를 가르치고 훈련시키며 그 자신 몸소 보이셨다. 통계로 보면, 교회는 어떤 단체보다 사회구제를 가장 많이 한다. 여기서 만족하면 안 된다. 더욱 더 많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 그래서 교회는 가난해져야 한다.

 

내가 경험한 가장 감동적인 성탄절이 있다. 1969년 2월에 전도사 신분으로, 인천의 어느 산동네의 작은 가게를 전세로 개척한 교회가 다섯 달 만에 시유지를 사서 30평의 시멘트 블록으로 교회를 지어 그해 11월 첫 주일에 입당을 했다. 내부수리도 못하고 의자도 없이 맨 땅에 가마니를 깔고 앉아 추위에 떨면서 대들보가 훤히 보이는 천정을 바라보며 첫 성탄절을 맞았다. 마치 예수가 태어난 마굿간 같은 분위기 속에서 맞은 성탄절이어서 40여 명의 성도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성탄절을 축하했었다. 그때의 감격스러움이 지금까지 영영 잊을 수 없다.

 그 후 보다 좋은 환경에서 수많은 성탄절을 맞았지만, 아직 나는 그때의 감사와 감격이 살아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리스도의 탄생지가 바로 마구간이라는데 그 대답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한국교회는 너무 화려하고 사치스럽다. 하나님께 받은 복을 불우한 이웃들과 함께 나누지 못하고 그냥 향유하는데 문제가 있지 않을까?

 

일본의 기독교는 한국보다 100년 정도 먼저 들어가, 상류층 사회로부터 번지기 시작했다. 일본의 기독교 인구는 왕성하던 시절 인구의 10%에 이르렀으나 지금은 0.1%로 하락했다. 그러나 한국의 기독교는 가난하고 불우한 곳에 파고들어 점차 상류층으로 확대되어 100주년 1984년 경에는 22%, 1천2백만까지 상회했었다. 일본 교회와 한국 교회의 차이는 무엇일까? 처음부터 마굿간 신앙의 유무에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한국의 교회도 90년대부터 성장이 정체되고 하향세이며, 작년 통계청의 발표에 의하면, 기독교 인구가 7백 4십만 여명으로 집계됐다. 각 교단마다 원인분석과 대책을 강구하고 있지만 쉽지 않다. 몇 년 전 기독교윤리실천운동본부의 ‘기독교신뢰도’ 조사에서 5점 만점에 겨우 2.82로 집계됐다. 100점 만점이라면 56.4 낙제(F학점)이니, 이를 어쩌랴?

 기독교에 대한 사회의 불신의 주원인은 교회지도자들과 신자들의 언행불일치가 32.2%로 가장 높게 지적됐다. 교회지도자들의 공금횡령으로 유죄판결과 감투싸움으로 교단이나 교회연합회의 분열 등이 계속되어 사회의 지탄이 되고, 안티기독교 세력들이 설치고 있어 하락세를 부채질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그 대신 사회가 교회신뢰의 요인으로 사회봉사활동을 가장 높게 꼽았다. 과거 가난했던 시절 한국교회는 사회봉사의 6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신뢰가 높아 교회의 성장으로 사회가 보답했다. 그렇다면 교회가 다시 가난해져야 할까? 하나님이 주신 부요를 잘못 사용하는데 대해 사회는 교회에게 큰 반성을 요구하고 있다. 즉 마구간 신앙과 그 정신의 회복을 말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주는 교회의 영원한 상징적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상록수문학(2014.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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