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유소솔 2021. 5. 11. 01:29

 

1952년 어느 날, 이태리에 주둔한 미군사령관의 아들 바비 힐(13세) 소년은 아프리카 밀림의 성자 슈바이쳐 박사의 전기를 읽고 큰 감동을 받는다. 그는 즉시 자기 용돈을 쏟아 약국에 가서 아스피린 한 병을 사서, 그것을 유럽지역 미 공군사령관에게 편지와 함께 붙였다. 편지의 내용은, 이 아스피린 한 병을 아프리카에서 나환자를 치료하는 슈바이쳐 박사의 병원에 비행기로 떨어뜨려달라고 했다. 만약 한 어른이 이런 짓을 했다면 정신이 돈 사람으로 비웃고 말았을 것이다.

 

소년의 기특한 동심(童心)에 사령관이 감동했다. 그러나 아스피린 한 병을 전하기 위해 비행기를 보낼 수 없었다.

사령관은 이 편지와 함께 이 사연을 방송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 프랑스 파리의 방송국에 보냈다. 이 편지를 받은 방송국에서도 감동을 받아 이 사연을 유럽 전역에 방송했다. 그러자 이 사연에 감동받은 유럽의 많은 사람들이 슈바이쳐 박사에게 보내달라며 돈과 의약품을 보내와, 한 달 만에 무려 40만불 어치의 돈과 약품을 보내오는 기적이 일어났다.

 

마침내 40일 후, 공군비행기 두 대가 의약품을 가득 싣고 아프리카에 날아가 슈바이쳐 박사가 일하는 람바레네 병원근처의 풀밭에 수천 개의 의약품 박스를 떨어뜨려, 슈바이쳐의 병원은 수많은 환자들의 치료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슈바이쳐 박사는 “어른들도 할 수 없는 일을 어린이가 했구나.”하고 감탄했다고 한다.

 

우리는 며칠 전에 어린이날을 보냈다.

아담과 이브 이후, 모든 인류는 누구든지 아기로 태어나 성장하여 어른이 되고, 어른들은 늙고 병들어 죽는다. 이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물계에 적용되는 생명성장의 원리로서, 우주 삼라만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이며 영원한 법칙이기도 하다.

오늘의 어른들은 그의 과거는 어린이요, 그의 미래는 늙은이다. 이것이 시간에 따라 변화되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그러기에 특정한 한 세대가 다른 세대에 대해 차별을 하거나 멸시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곧 자신에 대한 차별과 멸시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세대의 구별 없이 누구나 한 결 같이 사랑해야 한다. 그들은 우리의 미래 세대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역사는 성인이 주도하는 성인중심의 역사로서, 어린이에 대한 몰이해와 함께 가혹한 대우를 해왔으며,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참으로 미련하고 암울한 시기가 수천년 동안 지속되어 왔다. 그런 시대는 문명의 암흑기를 벗어나지 못했다.

 

어린이의 중요성을 각성한 첫 제도적인 사건이 1789년 영국인 레익스(R. Raikes)의 주일학교운동이었다. 

이 운동이 교회를 통해 번지다가, 18세기에 미국의 한 교회에서 5월 첫 주일을 어린이를 사랑하는 ‘꽃주일’로 지켜 어린이들 가슴에 꽃을 달아주고 기도해주므로, 어린이의 고귀함과 중요성을 일깨운 어린이 주일의 시작이었다.

 

한국은 1923년에 소파 방정환 선생이 당시 ‘아이’, ‘아해兒孩로 부르던 세대에서 ‘어린이도 한 인격체이므로, 호칭도 늙은이, 젊은이처럼 ’어린이’로 고쳐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 후, ‘어린이‘라는 잡지를 창간하고, 그해 5월 5일을 ’어린이 날‘로 선포한 후 어린이운동을 열심히 전개한 것이 어린이운동의 발단이었다.

 

그러나 어린이에 대한 고귀성과 중요성은 이미 2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제기되었고 교훈되었다.

그리스도는 많은 교훈 중에 한 어린이를 앞에 내세우고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선언하신 후, 어린이들을 일일이 안아주시고 축복기도를 하셨다. 이는 어린이를 멸시하는 폐습을 무너뜨리는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어린이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움과 함께 어린이야 말로 천국시민의 모델임을 깨우쳐주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선언의 배경은 천지창조 때부터 기원한다.

모든 만물을 말씀으로 지으신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모든 동식물들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인간을 창조하기 위해 흙을 빚어 사람(아담)을 지으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 이는 인간이야말로 동식물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귀한 존재임을 선언하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린이나 젊은이나 노인들도 존귀한 인격적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 때 인간은 비로소 존엄한 인간이 된다. 이 존엄성을 신앙으로 바로 찾을 때 인간의 인권은 차별이 없어진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수많은 기적 중의 기적이라는 ‘5병2어의 사건’은 한 어린이의 작은 도시락 제공에서부터 수만 명을 먹이는 기적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건을 통해 우리는 비록 작은 어린이라도 인류의 복지와 평화증진에 얼마든지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영국의 국민시인 워드워즈가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갈파했던 것이다.

 

문제는 어린이를 사랑한다면서 어린이를 우상화해서는 안 된다.

그런 어린이는 성장하면서 제 멋대로 사는 폭군으로 변할 수 있다. 어린이를 사랑하되 한계가 있다. 어린이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우상이 된다. 어린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이 주신 동심(童心)이 있다. 이는 죄악의 때가 아직 묻지 않은 순진하고 겸손하고 순종하는 마음이다. 그러므로 학교는 동심교육, 교회는 동심신앙교육을 해야 한다.

 

많은 환자들을 돕고 싶어 자기로서는 힘을 다해 아스피린 한 병을 보낸 어린이나, 배고픈 많은 사람들을 위해 자기 도시락을 아끼지 않고 주님께 바친 이름 모를 한 어린의 마음이 바로 동심이다.

모든 가정과 교회는 이 아름다운 동심을 잘 개발하여 하나님을 공경하고, 부모에게 순종하고 친구와 정답게 지내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죄에 물들지 않은 바르고 의로운 사람으로 바르게 성장시켜야할 동심교육의 사명이 있다. 이런 동심교육적 사명에 성공하면 미래는 밝을 것이고, 실패하면 우리의 미래는 어두울 것임을 어른들은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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