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의 감동 이야기

한국의 간디 김성혁 장로 1

유소솔 2021. 7. 28. 23:28

 

“1956년부터 30년 동안 당시 대구의 사람들은 경북대학교 근처에서 작은 키에 검정고무신을 신고, 손에는 검정색 손가방을 든 촌로의 아저씨를 보았을 것이다. 겉으로 보면 ”채권 삽니다.“하고 골목을 다니던 당시 흔한 채권 장수였다.

그러나 그는 1956년부터 거의 30년 동안 대구에 있는 국립 경북대학교 문리대 영어과 김성혁 교수였다.

 당시 대구나 경상북도 일대에 ‘괴짜 교수‘ 또는 ’한국의 간디‘라고 알려진 김성혁 교수, 그는 누구인가?

 

평양 미션스쿨과 동경외국어대학 유학

김성혁(金成赫)은 조선왕조가 일본에 강제 합병된 지 얼마 후, 1916년 11월 4일에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농부의 3대 독자로 출생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영민하고 부지런하게 성장하다 소학교에 입학하여 6년 동안 개근상과 우등상을 탔다. 그가 평양 미션스쿨 대광고등보통학교(5년제 중학과정)에 합격하자, 부친은 그를 위해 암소를 팔아서 등록금을 대고, 유학비를 대주었다. 그는 이를 통해 부모의 사랑이 지극함을 깨달았다.

그는 선교사가 가르치는 성경과 영어공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고, 평생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결심한다. 그는 중학 2학년 때부터 선교사들이 주는 장학금을 받아 공부했고, 새벽에는 신문배달로 고학했다. 그가 졸업반일 때 선교사들이 그를 예비 장학생으로 선발했고, 일본 도쿄외국어대학 입시에 합격하는 조건을 달았다. 그는 당시 동양 최고인 도쿄외국어학교에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합격하자, 모두 그를 천재라고 불렀다.

그의 일본에서 대학과정도 한국의 선교사가 보내주는 장학금으로 냈고, 나머지 책값과 생활비는 고학으로 벌어서 메웠다. 재학 중에 부친의 작고소식에 고향에 가서 장례식을 마친 후, 3대 독지여서 어른들의 성화에 고향 처녀와 결혼식을 치르고 학교로 돌아왔다. 그가 졸업하게 되자, 그의 영어 성적이 우수함을 안 도쿄외국어대학에서 그에게 영어 강사직을 제시했다. 그래서 그는 당분간 일본에 남아 모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귀국과 월남, 그리고 6. 25 전쟁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날이 왔다. 그가 이 날을 위해 얼마나 기도했던가. 당시 일본의 분위기는 패전으로 전 국민이 슬픔과 실의에 빠졌다. 그는 해방된 조국에서 대학생들을 가르치는 소망을 안고 귀국했다. 나이 29세였다.

그러나 해방된 조국은 38선으로 남북으로 나눠졌다. 남쪽은 미군이, 북한은 소련 공산군이 진주했다. 그는 신앙의 자유가 없는 북한에서 살 수 없음을 깨닫고, 선교사들의 고향 미군이 다스리는 남한에 갈 것을 결심했지만 모친이 떠나지 않겠다고 해서 아들을 모친 곁에 남겨 놓고 눈물로 떠났다. 그는 곧 통일되면 부모님께 돌아 올 것을 약속하고 아내와 함께 죽음의 고비를 넘는 고생 끝에 38선을 넘어 남한에 왔다. 1948년 봄이었다.

서울에 왔지만, 반기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땅이었다. 그는 작은 방 한 칸에 세 들어 살면서 주일에는 북한의 신자들이 모이는 영락교회나 평안교회에 가서 예배드리고 고향인을 만났다. 그러다 1950년 6.25 전쟁으로 피란 다니며 고생했다가 수복 후, 몇 대학 강사로 연명을 하다 1956년 영락교회에서 만난 고병간 박사가 국립 경북대학 학장으로 가면서 그를 영어교수로 초빙했다. 그는 기쁘게 대구에 내려가 소천할 때까지 대학교수로, 뛰어난 영어학원의 강사로 이름을 날렸다.

 

낮에는 대학교수, 저녁에는 영어학원 강사

그는 뜻이 있어 낮에는 대학 교수요, 밤에는 자택 2층 다다미방에 사설학원을 차리고 시사영어를 강습했다.

그가 과외학원을 차린 것은 가난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어 공부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는 대학 교수직은 가족의 생계를 위한 것이고, 과외학원은 하나님 일을 하기 위한 것으로 구분했다.

그의 제자 오양호 교수(인천대 명예교수)는 이런 증언을 한다.

“나는 이분 밑에서 근 6년 이상 공부를 했다. 당신의 집에 영어강습소를 차려 놓고 대학생들에게 과외를 하셨다.

‘타임’지와 ‘다이제스트’를 하루 3시간씩 강의했는데, 나는 학부, 대학원, 석, 박사 과정시절에 그 강습소에서 공부 했다. 그때 수강료가 500원이었다. 이 수강료를 선생님이 직접 받았는데, 검은 천 신주머니 같은 전대를 앞에 놓고, 영어잡지 ‘다이제스트’ 뒷장에 어느 학교 누구, 몇 월 며칠까지라고 몽당연필로 또박또박 쓴 후, 받은 돈을 전대에 넣는다. 그 흔한 노트에 기록하지도 않고, 금고도 없다.

그때 500원이면 요즘 5만원 이상이어서 월수입이 기백만원은 족히 될 것이다. 그것도 해마다 여름이나 겨울방학도 없이 사시장철 그의 다다미방에는 학생들로 언제나 초만원이었으니 대학 교수치고는 짭짤한 부수입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많은 돈이 도대체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과외수입과 암소장학금

“해마다 신학기가 되면 그는 1년 동안 과외수업으로 모은 돈을 뭉치로 싸들고 대구의 우시장으로 간다. 그는 그 돈으로 큰 암소 10마리를 산 후, 소를 판 사람들에게 암소 고삐를 각자 쥐고 줄을 지어 당시 김성혁 장로가 다니는 삼덕교회로 가게 한다. 그가 장로로 시무하는 교회에는 이미 그가 선발한 10명의 장학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먼저 그들에게 “밖에 있는 암소 한 마리씩을 장학금으로 줄 터이니, 잘 길러서 새끼를 낳으면 새끼를 팔아서 계속 등록금으로 사용해서 열심히 공부해서 큰 일꾼이 되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그리고 모두 교회 마당으로 나와 그가 직접 암소고삐를 한사람씩 들려준다. 장학생들은 고맙다고 인사한 후, 암소 고삐를 쥐고 자기 집을 향해서 간다. 이것이 소위 ‘암소장학금’이다. 이 암소장학 10년 간 장학생은 200명이 넘었다. 가난한 학생들은 암소장학금을 타기 위해 교회를 찾아 신앙생활을 시작해서 나중에 목사나 장로가 되기도 하고, 예수 잘 믿는 교수나 공무원 그리고 사장들이 되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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