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의 감동 이야기

만주에서 전도하다 죽은 성결교회 창립자

유소솔 2021. 6. 10. 14:32

 

만주에서 전도하다 죽은 성결교회 창립자

            - 정빈(鄭彬) 전도사

 

1878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그는 당시 전통문화로 유교를 숭상하고 조상제사를 드렸으며, 8살에 서당에 들어가 한학을 공부했다. 그런 그가 10살쯤 기독교에 입신했는데, 1882년 해주에는 북경에서 세례 받고 돌아 온 서상윤의 전도로 교회가 이미 세워졌었다.

그는 관례에 따라 15세쯤에 결혼했으나, 주일학교에서 배운 신앙에 대한 열망 때문에 이듬해 가족을 데리고 서울로 갔다. 그리고 1893년에 세워진 종로의 연동교회의 무어(Moore) 선교사가 목회하는 교회의 교인이 되어 종로 YMCA에 가서 성경공부와 신앙강좌를 들었다.

강사 중 세브란스 의전의 학생 고명우 씨가 있었다. 고명우는 청년들에게 ''이미 기울어져 가는 조국을 붙잡기보다 영원히 망하지 않은 하늘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미국 성도들 후원으로 식비, 학비가 무료인 동경성서학원을 소개했다. 그 청년들 속에 정빈과 김상준이 있었다.

그들은 동경성서학원으로 함께 가서 공부하자고 합의했다. 그들은 고명우 씨의 동경성서학원 약도와 입학 추천서를 받고, 처자식들은 각기 고향의 집에 가서 맡기고, 일본 여비만을 가지고 인천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떠났다. 그 때가 1905년 8월이었다.

 

당시 동경성서학원 학생 50명 중에 한국인은 정 빈과 김상준 두 사람 뿐이었다. 그들은 일본어가 서툴러 기숙사 한방에 있는 일본인 학생에게 일본어를 배웠다. 그들은 오전에는 성서강해를 배우고, 오후는 자유시간으로 개인공부나 기도, 전도했으며, 밤에는 전 학생들이 모여 북과 나팔을 불며 노방전도를 한 후, 밤10시에 기숙사로 돌아오는 훈련을 받았다.

 

정 빈이 가장 좋아한 과목은 사중복음인데, 성결, 신유, 재림이라는 성경의 핵심으로 그는 사중복음에 매료되어, 평생 사중복음만을 전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또 교파를 만들지 않고 복음만을 전하여 사람이 구원 받게 하는 순수한 전도방침이었다. 그는 평생토록 사중복음을 전하는 순수 복음전도자로 살 것을 굳게 결심하고, 김상준과도 합의했다. 이 결심은 그에게 목사안수 받지 않고 평생 무명의 전도자의 삶을 살게 한 거룩한 고집으로 나타났다.

 

1907년 4월 하순, 그는 김상준과 함께 2년간의 과정을 마치고 졸업했다. 정 빈, 김상준, 중간에 입학한 이장하 등 세 사람은 공부를 하면서도, 졸업한 후 조국에 돌아가 동경의 복음전도관과 성서학원 같은 전도관과 성서학원을 세워, 소망이 없는 민족에게 영원한 하늘나라의 소망을 심어주는 복음전도야 말로 시급하다는데 뜻을 모으고 기도했다.

그들은 일본 동경성서학원과 동경복음전도관을 세운 동양선교회(OMS)선교사의 지원으로 5월 중순에 서울 종로 염곡에 큰 기와집 한 채를 월세로 얻어 전도관을 설립하였다. 그들은 동경에서 배운 대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거리에 나가 북을 치고 찬송을 불러 사람을 모았고, 사람들을 간단한 전도말씀으로 인도하여 설교를 듣게 했다.

 

이때 회개하고 구원체험한 자가 5명이 나왔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는 주님의 뜻을 따라 정빈은 그들을 소중히 여겨 개인 신앙을 지도했다. 그래서 1907년 5월 30일에 ‘경성복음전도관’이 탄생했는데, 전도관이란 명칭은 ‘오직 영혼구원‘에 집중하려는 정 빈 전도사의 뜻이었다.

그동안 전도관은 계속 확장되어, 진남포와 개성에 전도관이 신설되자, 동양선교회 본부에서는 잘 돌보기 위해 1910년에 영국인 토마스 선교사를 초대 감독으로 파송했고, 그는 1911년 3월에 경성전도관에 임시 성서학원을 개설하여 전도자들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1912년 아현동 언덕에 성서학원 2층 교사가 신축되자, 정빈은 전도관을 사임하고 성서학원 학생들에게 ‘오직 전도‘를 가르치기 위해 교수를 맡고, 김상준이 경성전도관 주임을 맡았다. 그 후, 규암과 아현, 은산과 김천에 전도관이 설립되어, 한국의 전도관은 7개로 확장되었다.

1914년에 동양선교회 카우만, 길보른이 내한하여 한국전도관 최초로 김상준, 이명직, 이장하, 강태온 등 에게 목사안수식을 거행했다. 이 안수식에 최초의 복음전도관의 창립자이고 주임이며, 성서학원 교수인 정빈이 탈락한 것은 의외였다. 그 이유는, 정빈이 제도적인 목사보다 순수한 복음전도자의 삶을 선호하는 고집 때문에 목사안수를 거부한 것이다.

 

정 빈은 사직을 한 후, 한인들이 이주한 북간도로 가서 자유롭게 교회를 개척하고 성경을 가르치며 전하다가, 웬일인지 3년 후에 돌아왔다. 다시 동양선교회의 파송으로 1917년에 안성전도관을, 1919년에 인천전도관을 개척하여 목회하던 중, 1921년 9월에 돌연 인천교회를 사직하고 또 다시 북간도로 떠나버렸다.

그 이유는, 1921년에 복음전도관을 성결교회로 명칭을 변경한 것에 대한 반발이요, 전도본위의 전도관 창립의 정신이 사라진데 대한 환멸 때문이다. 그는 북간도 동아기독교의 후원으로 훈춘하남교회를 개척하고, 용정교회에서 시무한 후, 종성성경학원의 교수로 재직하며 자유롭게 만주일대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만주지역의 교회지도자들이 거의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정빈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아마도 해방이전에 70이 가까운 무명의 노인전도자로 황량한 만주 땅에서 삶을 마친 듯싶다. 오직 복음만을 고집하는 순수한 복음주의자, 바로 그가 정빈 전도사였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 15) 

한국성결교회는 창립자 정 빈의 ‘오직! 복음전도’의 정신을, 교회의 명칭 속에서도 끊임없이 이어가야 할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