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아침의 단상

서로의 사이에 그분을 모실 수 있다면

유소솔 2022. 8. 14. 00:06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면서 가장 많이 사용하게 되는 단어가 ‘거리’입니다.

그 예가 ‘거리 두기’인데, 사회 곳곳에서 거리 두기를 실천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교회도 좌석에 표시를 하고 친교실에 노란 선을 바닥에 표시해 안전거리를 유지합니다.

이제 적당한 거리 두기는 일상 속에 서로를 보호해야 할 덕목이 됐습니다.

 

지리적인 거리도 있지만, ‘너와 나 사이’ 처럼 정서적 거리도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심리적 거리를 연구한 학자가 이런 발표를 했습니다.

사무적 관계의 거리는 120㎝, 친밀한 사람의 거리는 15㎝ 정도가 적당하다는 것입니다.

사무적인 관계는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의 거리 두는 게 좋고, 부모와 자녀, 연인 사이엔 거리가 가까울수록 

더 친밀해질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연구를 통해 정서적 거리가 물리적 거리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지구태양을 사랑한다며 태양 쪽으로 뛰어든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이 지구가 좋다고 달려와 안긴다면 어찌 될까요. 건축물의 기둥들도 서로 좋은 거리를 두며 세워져 벽과 지붕을 받치고 있고, 꽃과 꽃, 나무와 나무들 사이에도 적당한 간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죄성이 있는 우리 인간들은 고슴도치 같습니다.

떨어져 있으면 외롭고 가까이 있으면 서로에게 있는 가시에 찔려 아파합니다.

가까이하되 좋은 거리를 둔다면 외롭지도 않고 가시에 찔리지도 않습니다.

함께 가까이 있되 마구 대하지 않는 예의의 공간과 거리. 그래서 하늘과 바람이 이 사이에서 춤추며 신선하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는다(고전 13:5)”고 했습니다.

무례히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름다운 거리감’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아름다운 거리를 유지하여 노래하는 거리의 미학입니다. 아무리 가까워도 함부로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으며 아름다운 거리를 유지하는 것, 이것이 사랑입니다.

최고의 아름다움은 서로 맞물려 있는 것의 조화입니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이에도 늘 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인간의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이 사이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하니"(삼상 20:42)

 

‘너와 나 사이에 계신 하나님!’ 

이것이 다윗요나단의 영원한 우정의 비결이었습니다.

우리가 서로의 사이에 하나님, 바로 그분 모실 수 있다면 우리의 가정과 직장, 우리의 신앙공동체는 가장 행복한 공동체가 되지 않을까요? 여러분을 사랑합니다.(임채영 목사. 서부성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