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친일 훈장과 한국 훈장

유소솔 2020. 12. 18. 23:13

1957년에 아현동 서울신학대학에 입학한 필자는 서울역 가는 지름길로 춘향이 고갯길을 가끔 넘어 다녔다. 왜 춘향이 고갯길인지 모르지만 당시 그 고갯길 옆 밑 언덕에 흰 대리색으로 지은 고급 2층 양옥집이 하나 있었는데, 창틀이 뜯긴 채 아무도 살지 않은 흉가였다.

알고 보니, 그 집은 을사오적의 하나인 이완용의 저택으로 그가 죽은 후 후손들이 살았는데 광복 후, 시민들의 규탄에 의해 후손들이 쫓겨나 곳곳이 파괴되어 흉가로 전락되어 있었다. 지금은 그 지역이 개발되어 그 저택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그 흉가는 당시 모든 사람들에게 민족 반역자의 말로를 교훈하고 있었다.

 

최근 국립 공문서고에서 일제日帝 시 훈장 받은 친일분자들의 명단이 발견되어, 과거사 청산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했다. 이 문서는 1904년 러.일전쟁시 일군에 참전한 조선인 장교 28명을 비롯하여 1910년 일제의 합병정책에 협력한 이완용 외 공신 356, 또 조선독립 쟁취를 위해 일어난 의병들을 토벌한 공로로, 그리고 19193.1운동에 참가한 조선인들을 진압한 공로로 친일파 경찰과 군인 560명이 무더기로 훈장을 받았고, 결국 1939년까지 3,535명의 친일분자들이 일왕의 훈장을 받은 명단과 기록이었다.

 

부문별로는, 법조계에 73(판사 55, 검사 18), 경찰 586, 교육자 689, 군수 92명 등이 서훈자로 등재되어 있었고, 심지어 일경의 밀정 노릇한 사람들, 분노한 독립군과 의병들에게 참살을 당한 친일파들도 서훈 대상이 되어 일왕의 훈장과 함께 막대한 은사금을 받아 가족들이 영화를 누리고, 후손들은 좋은 대학에서 학문을 쌓아, 정치 경제 문화부문에 진출하여 떵떵거리며 산 것이다.

하지만 멸망한 조국을 회복하기 위해 힘쓴 독립투사들은 체포되어 감옥살이나 고문 등으로 죽어갔고, 그 가족들은 일경의 물 샐수 없는 치밀한 감시와 방해로 변변한 직장 하나 구하지 못해 가난과 고통 속에서 거지꼴이 되어 살았기에 변변한 학교도 마치지 못해 무식자가 되어 힘든 육체의 노동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하며 비참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1945년 하나님 은혜로 연합군에 의해 갑자기 광복이 왔다. 일제는 패망하여 물러갔고, 대한민국이 건국될 때 그동안 고난당한 독립투사들과 그 가족이 각광을 받고, 친일파들은 심판을 받아야 하는 역전의 기회가 왔다. 그리하여 반민족특위가 발족되어 일제하에 조국을 배반한 친일분자들을 심판함으로, 진정한 정의와 애국이 무엇인가를 선명히 밝혀 국가의 기강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새 국가를 이끌고 나갈 초대 대통령은 인재난人材難에 고민했다. 마땅히 독립투사나 그 자녀들을 요직에 임명하려고 그들의 이력서를 받아보니 학력, 경력 등이 기대보다 너무 동떨어져 실무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되었다. 그래서 어쩔 수수 없이 구속된 친일파들을 민족의 이름으로 용서하기로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서슬이 퍼렇게 발족했던 반민특위는 대통령의 지시로 해체되어 그들은 모두 석방되었고, 그들 중 일부는 행정실무에 능해 대한민국 새 정부의 각계 요직으로 발탁되었다. 그 결과 그들은 국가발전의 공로로 퇴임 시 훈장을 또 받았다. 친일훈장을 받은 자가 또 대한민국 훈장을 받았으니, 이런 모순이 어디 있을까?  왜 그랬을까?

 

2차 대전의 종전을 기점으로 세계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냉전冷戰시대로 변했고, 한반도는 양 이념의 희생양으로 분단되었다. 1948년 건국의 초대대통령 이승만은 우익과 좌익의 극한 대립과 혼란 속에서 자유민주주의의 확립을 위해 독립투사로 헌신했던 좌익적인 민족주의 계열을 척결하고, 우익적인 행정력 있는 친일파들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즉 민족이냐, 이념이냐의 선택에서 그는 이념을 선택한 것이다.

그 덕택에 1950년 북한공산주의 남침을 우익국가들의 도움으로 힘겹게 물리치고 오늘의 자유민주 국가를 확립할 수 있는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에 놓친 과거사 청산문제는 역대 정권의 발목을 잡고 있는 아킬레스의 건이라는 것, 또한 사실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어쩌랴? 동족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무신론적 민족주의보다 자유와 평화를 존중하는 유신론적 민주주의가 시대를 초월하여 더 소중한 것을. 이런 깊은 뜻이 우리의 통일정책에도 반드시 반영돼야 할 것이다.

                                                                                                          - 한국크리스천신문(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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