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의 감동 이야기 34

날마다 내 생일이었으면

오래 전, 미국에 이민 간 친구로부터 온 카톡의 글입니다. 어느 날 나는 이른 아침에 커피 가게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줄서 있었다. 이 가게는 다른 가게보다 친절하고 값이 싸서 손님들이 많은 편이다. 벽 한쪽에 환한 웃음 띈 예수님 초상화가 있어 나는 자주 찾는다. 내 앞에 서 있던 남루한 옷을 입은 한 노인의 차례가 되었다. 노인이 커피 한 잔을 받고 지갑에서 동전을 꺼내 값을 지불하자, 계산대의 직원이 말했다. “손님. 저기 있는 빵도 하나 가져가세요. 그리고 멋진 날 되세요” 이 노인이 잠시 멈칫하자, 직원은 다시 말했다. “제가 사는 거예요. 오늘이 제 생일이거든요. ” 그 말에 노인은 연신 고맙다는 말을 하고, 커피와 빵 하나를 들고 자리에 가서 앉았다. 마침내 내 차례가 되자 나는 그 남자 직원..

맨발의 성자 ‘선다 싱’

'선다싱'은 1889년에 인도의 푼잡 지방에서 출생했다. 부모는 힌두교의 한 종파인 시크교의 신자로, 비교적 경제가 넉넉한 가정이었다. 그는 경건한 부모에게서 시크교의 신앙교육을 철저히 받으면서 성장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시크교에 대한 믿음이 깊었다. 그는 8살에 초등학교 밋션스쿨에 입학하였다. 그의 고향에는 초등학교가 없고, 영국 선교사가 세운 사립학교가 하나 있었다. 할 수 없이 그의 부모는 기독교학교에 보냈지만, 그는 성경공부 시간에 노골적으로 기독교가 싫어 선생님이 주는 성경을 찢어버리는 등 말썽을 부렸다. 그가 14세 때 사랑하는 어머니가 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어머니의 병 낫게 해달라고 한 달동안 간절히 기도했지만 어머니가 죽게 되자 시크교에 회의를 품게 되었다. 그리고 어머니를 잃은 허..

대통령 부름을 거절한 최석모 목사

최석모 목사(1890~1950)는 성결교회 초창기부터 6.25 전쟁 때까지 교회를 발전시킨 공로자였다. 그는 서울에서 출생하여 보성학교, 한성영어학원을 졸업한 당시 몇 되지 않은 영어에 능숙한 지성인이었다. 서재필과 이승만이 이끈 독립협회가 조선 왕 고종에 의해 해산되고 간부들이 종신 징역형을 받았다. 이승만은 감옥에서 성경을 읽고 신자된 후 7년 만에 석방되자, 세계는 미국의 시대임을 깨닫고 한성영어학원에 입학했을 때 최석모도 입학해 15살 차이지만 이승만을 형님처럼 그의 지도력에 따른 온건한 협력자였다. 당시 상동감리교회 청년으로 미국 세계감리교회 청년대회에 한국대표로 선발되어 출국한 이승만은 미국에서 계속 머물며 교포들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하다 1919년 삼일만세운동이 미국 신문에 보도되자, 중국으..

목사 같은 판사 문기선 3.

그가 대전 고법원장 재직시 대전 부시장의 직원개입 선거부정 야당의 고발사건 때였다. 지법에서 승리한 여당이었으나 야당이 상소한 고법에서 판사들이 자유당 눈치를 보며 맡기를 꺼렸다. 할 수 없이 법원장이 맡아서 행한 재판에서 그는 지법판결을 무효화하고 단호히 실형을 판결하므로 자유당이 큰 낭패를 당했다. 그는 정부에 찍혀 전주지방법원장으로 좌천되었다. 전주에서는 당시 유능한 야당 국회의원 이0승 의원의 총선 부정개표 고발사건이 있었다. 목에 가시 같은 이0승 의원의 재선 저지 위해 자유당은 현직 장관을 사임시켜 내세웠으나 인기는 야당이 우세했다. 자유당은 선관위원장을 매수했고, 개표하다 이의원 표 수십장이 여당 표에 든 것을 발견한 야당참관인이 항의하자, 위원장이 그냥 묵살하고 진행을 시켰다. 이를 지켜본..

목사 같은 판사 문기선 장로 2.

조국이 해방되었으나 승리한 우방국의 각서에 따라 한반도는 38선을 기준으로 분단되었다. 북에는 소련군이. 남쪽에는 미군이 당분간 주둔하여 신탁통치를 맡게 되었다. 미군은 3권 분립으로 국가를 운영하는 민주주의 국가이므로 하지 중장을 대표로 4천명의 장교들이 와서 행정과 사법을 장악하여 요인들을 군 단위 이상 각 지역에 배치하여 백성들의 민원을 처리하는 등 봉사를 통해 우리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쳤다. 그러나 북한은 소련군이 점령하고 공산주의 국가로 만들기에 힘을 쏟았다. 그들은 당시 소련군 대위 김성주를 꼭두각시로 임명하자, 그는 유명한 독립군 대장 고 김일성 장군의 이름을 도명하여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공산주의 국가를 세워갔다. 북한 사람들은 김성주는 모르지만 고 김일성 장군의 얘기를 전설처럼 들었기에 처..

목사 같은 판사 문기선 장로 1.

그는 조선 말기인 1896년 서울 당주동에서 출생하다. 부친은 구한말 고종황제의 시종무관으로 재직하다 한성경시청 총순, 강원도 경무관, 파주 군수를 역임한 관리의 가문이다. 그는 서울에서 매동소학교, 한성고보 사범과를 지원, 어린 학생들부터 애족심을 길러주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명에 따라 최우수성적으로 졸업하고(1911) 소학교 교사로 발령 받아 근무했다. 동족이 이유없이 차별 받자 교직을 떠나 법학도가 되다. 그때는 조국이 일제에 합병당한 일정시대로, 전국적으로 의병들이 일어나 항거했고 체포되면 재판도 없이 사형하는 등 조선인들이 차별 학대당하는 것을 보다 못해 교사를 사직하고 처음 개강한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수석으로 입학, 졸업했으나 일본인 졸업생만 법관으로 발령하고 조선인을 발령하지 않은 차별하자, 할..

한국의 간디 김성혁 장로 3

대통령 표창 위해 찾아 간 동 직원을 쫓아내다. 김성혁 교수의 불법과외를 조사하다 오히려 감동을 받은 형사가 본서에 들어갔다. 그리고 서장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김성혁 교수의 사설과외는 무인가 불법과외임을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단속보다는 오히려 국가가 장려하고 표창해야 할 선한사업임을 깨달았습니다. - 그게 무슨 말인가? "여기 보십시오.” 형사가 가지고 간 뉴스위크와 다이제스트 등 자료와 만나 본 사람들의 진술서 등 자세한 조사내용을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경찰서장이 놀랐다. “그렇다면 동사무소에 연락해서 새마을 성공사례의 하나로, 당국에 보고해서 표창을 상신하도록 하시오. 우리 관내에 처음으로 생긴 경사가 아니요?” “예. 그렇게 조치하겠습니다.” 그래서 1970년대 정부의 새마을 사업의 성공..

한국의 간디 김성혁 장로 2

부채(負債)의식으로 시작한 장학사업 김성혁 장로가 이처럼 그의 과외강습비를 대학생 장학금으로 사용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가 중학생 때부터 선교사의 장학금으로 공부했고, 또 일본유학도 선교사들 장학금으로 공부해 평생 편하게 살 수 있었으니, 이제 그 빚을 갚아야 한다는 부채의식 때문이었다. 사도 바울이 선교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그 많은 영혼들을 구원했듯 김성혁 장로의 가슴에 깊이 박힌 장학에 대한 부채의식은 그의 끊임없는 실천을 통해 수많은 가난한 학생들의 교육을 잇게 했으며, 그 수준을 향상시켜 사회에 공헌케 했다. 또 나중에 그의 도움 받은 사람들은 가난한 학생들 뿐 아니라, 가난한 성도들의 사업자금과 대구 근처의 농촌 미자립 교회나 교역자들, 그리고 생활고에 시달린 나환자들에게까지 그 혜택이..

한국의 간디 김성혁 장로 1

“1956년부터 30년 동안 당시 대구의 사람들은 경북대학교 근처에서 작은 키에 검정고무신을 신고, 손에는 검정색 손가방을 든 촌로의 아저씨를 보았을 것이다. 겉으로 보면 ”채권 삽니다.“하고 골목을 다니던 당시 흔한 채권 장수였다. 그러나 그는 1956년부터 거의 30년 동안 대구에 있는 국립 경북대학교 문리대 영어과 김성혁 교수였다. 당시 대구나 경상북도 일대에 ‘괴짜 교수‘ 또는 ’한국의 간디‘라고 알려진 김성혁 교수, 그는 누구인가? 평양 미션스쿨과 동경외국어대학 유학 김성혁(金成赫)은 조선왕조가 일본에 강제 합병된 지 얼마 후, 1916년 11월 4일에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농부의 3대 독자로 출생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영민하고 부지런하게 성장하다 소학교에 입학하여 6년 동안 개근상과 우등상..

‘할렐루야’로 일본성서학원 입학한 사람

1907년 7월, 그러니까 지금부터 114여 년 전 일이다. 미국인 카우만과 길보른 선교사가 동양의 선교를 목적으로 일본 동경에 세운 동경성서학원에 어느 날 이상한 복장을 한 두 남자가 나타났다. 그들은 여름이어서 시원한 모시옷을 입었는데. 머리는 검은 갓을 쓰고, 갓 속에는 상투를 틀었다. “선생님, 이상한 사람들이 나타났어요.” 수업을 하다 열려진 창을 통해 이들을 처음 본 일본 학생이 놀라 소리 질렀다. 선교사에게 수업을 배우던 일본학생들이 모두 창 곁으로 달려가 보고 놀랐고, 가르치던 선교사도 이를 힐끗 본 후, 2층 교실에서 1층으로 걸어서 내려갈 때 호기심에 학생들 몇이 따라 내려갔다. 그동안 중국인, 한국인 몇 사람을 이 학교에서 2년 간 무료로 공부를 시켜 전도자로 귀국 시켰는데, 저런 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