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의 감동 이야기 37

4명의 군목 이야기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1월 22일 저녁이었다. 이날 뉴욕 항을 떠난 연합군 병력 수송선 도체스터호는 904명의 군인들을 태우고 어둠을 가르며 북 대서양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침내 항해 12일 만인 2월 3일 오후에 수송선은 유럽의 어느 영해에 들어서고 있었다. 당시 맹활약하는 독일의 잠수함이 미국 수송선을 발견하고 은밀히 접근하여 어뢰를 발사했다. 어뢰를 맞은 미국 수송선은 얼마 후에 점점 물에 잠기기 시작했다. 금방 수송선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병사들은 서로 붙잡고 울부짖는 등 아비규환의 현장으로 변했다. 이 배에 승선한 네 명의 군목들은 침착하게 많은 병사들을 달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군목들은 그 많은 병사들을 차례로 구명정으로 열을 지어가도록 안내했다. 담당 장교들이 구명조끼를 병사들에게..

한국의 어머니, 서서평(徐舒平) 선교사

한 여인이 말을 타고 전라도 일대를 한 달 간 순회한 뒤 이런 글을 남겼다. "이번에 만난 여성 500명 중 이름이 있는 사람은 열 명뿐이었습니다.지금이 1921년인데도, 조선여성들은 큰 년이, 작은 년이, 개똥어멈으로 불립니다. 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글을 가르쳐 주는 것이 저의 큰 기쁨입니다." 간호 선교사로 조선에 온 엘리자베스 쉐핑 (Elisabeth Johanna Shepping, 한국명; 서서평 徐舒平; 1880~1934)이 직접 쓴 기록이다. 1920년 서서평은 독일 출신의 미국 선교사로 한국 최초의 ‘간호선교사’로 왔다. 당시 조선은 가난이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전염병으로 병자가 넘쳐나던 시절이었다. 몹씨 어려운 이들에게서 눈과 마음을 뗄 수 없었던 그녀는 서양식 삶을 고수하던 여러 선..

사랑의 의사 처방전

1920년대 영국의 한 시골 병원에 초라한 행색의 부인이 찾아왔다. “선생님, 지금 제 남편이 죽어 갑니다. 제발 살려 주세요.” 의사가 하던 일을 멈추고 서둘러 왕진 가방을 챙겨 들었다. 그러자 부인은 의사의 눈치를 살피며 이렇게 말했다. - 죄송합니다만….저는 지금 돈이 한 푼도 없습니다.” “그게 무슨 문제입니까, 우선 사람을 살리는 것이 문제지요.” 의사는 즉시 마차에 부인을 태운 후, 어느 낡고 초라한 집에 도착했다. 의사는 서둘러 쓰러져 누운 부인의 남편을 진찰하고 나서 말했다. “큰 병은 아니니 안심하십시오.”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약을 처방해서 드릴터이니, 제 병원까지 함께 가셔야겠습니다" 병원으로 돌아온 의사는 잠시 준비한 후, 부인에게 작은 상자를 하나 건넸다. “이 상자를 ..

날마다 내 생일이었으면

오래 전, 미국에 이민 간 친구로부터 온 카톡의 글입니다. 어느 날 나는 이른 아침에 커피 가게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줄서 있었다. 이 가게는 다른 가게보다 친절하고 값이 싸서 손님들이 많은 편이다. 벽 한쪽에 환한 웃음 띈 예수님 초상화가 있어 나는 자주 찾는다. 내 앞에 서 있던 남루한 옷을 입은 한 노인의 차례가 되었다. 노인이 커피 한 잔을 받고 지갑에서 동전을 꺼내 값을 지불하자, 계산대의 직원이 말했다. “손님. 저기 있는 빵도 하나 가져가세요. 그리고 멋진 날 되세요” 이 노인이 잠시 멈칫하자, 직원은 다시 말했다. “제가 사는 거예요. 오늘이 제 생일이거든요. ” 그 말에 노인은 연신 고맙다는 말을 하고, 커피와 빵 하나를 들고 자리에 가서 앉았다. 마침내 내 차례가 되자 나는 그 남자 직원..

맨발의 성자 ‘선다 싱’

'선다싱'은 1889년에 인도의 푼잡 지방에서 출생했다. 부모는 힌두교의 한 종파인 시크교의 신자로, 비교적 경제가 넉넉한 가정이었다. 그는 경건한 부모에게서 시크교의 신앙교육을 철저히 받으면서 성장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시크교에 대한 믿음이 깊었다. 그는 8살에 초등학교 밋션스쿨에 입학하였다. 그의 고향에는 초등학교가 없고, 영국 선교사가 세운 사립학교가 하나 있었다. 할 수 없이 그의 부모는 기독교학교에 보냈지만, 그는 성경공부 시간에 노골적으로 기독교가 싫어 선생님이 주는 성경을 찢어버리는 등 말썽을 부렸다. 그가 14세 때 사랑하는 어머니가 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어머니의 병 낫게 해달라고 한 달동안 간절히 기도했지만 어머니가 죽게 되자 시크교에 회의를 품게 되었다. 그리고 어머니를 잃은 허..

대통령 부름을 거절한 최석모 목사

최석모 목사(1890~1950)는 성결교회 초창기부터 6.25 전쟁 때까지 교회를 발전시킨 공로자였다. 그는 서울에서 출생하여 보성학교, 한성영어학원을 졸업한 당시 몇 되지 않은 영어에 능숙한 지성인이었다. 서재필과 이승만이 이끈 독립협회가 조선 왕 고종에 의해 해산되고 간부들이 종신 징역형을 받았다. 이승만은 감옥에서 성경을 읽고 신자된 후 7년 만에 석방되자, 세계는 미국의 시대임을 깨닫고 한성영어학원에 입학했을 때 최석모도 입학해 15살 차이지만 이승만을 형님처럼 그의 지도력에 따른 온건한 협력자였다. 당시 상동감리교회 청년으로 미국 세계감리교회 청년대회에 한국대표로 선발되어 출국한 이승만은 미국에서 계속 머물며 교포들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하다 1919년 삼일만세운동이 미국 신문에 보도되자, 중국으..

목사 같은 판사 문기선 3.

그가 대전 고법원장 재직시 대전 부시장의 직원개입 선거부정 야당의 고발사건 때였다. 지법에서 승리한 여당이었으나 야당이 상소한 고법에서 판사들이 자유당 눈치를 보며 맡기를 꺼렸다. 할 수 없이 법원장이 맡아서 행한 재판에서 그는 지법판결을 무효화하고 단호히 실형을 판결하므로 자유당이 큰 낭패를 당했다. 그는 정부에 찍혀 전주지방법원장으로 좌천되었다. 전주에서는 당시 유능한 야당 국회의원 이0승 의원의 총선 부정개표 고발사건이 있었다. 목에 가시 같은 이0승 의원의 재선 저지 위해 자유당은 현직 장관을 사임시켜 내세웠으나 인기는 야당이 우세했다. 자유당은 선관위원장을 매수했고, 개표하다 이의원 표 수십장이 여당 표에 든 것을 발견한 야당참관인이 항의하자, 위원장이 그냥 묵살하고 진행을 시켰다. 이를 지켜본..

목사 같은 판사 문기선 장로 2.

조국이 해방되었으나 승리한 우방국의 각서에 따라 한반도는 38선을 기준으로 분단되었다. 북에는 소련군이. 남쪽에는 미군이 당분간 주둔하여 신탁통치를 맡게 되었다. 미군은 3권 분립으로 국가를 운영하는 민주주의 국가이므로 하지 중장을 대표로 4천명의 장교들이 와서 행정과 사법을 장악하여 요인들을 군 단위 이상 각 지역에 배치하여 백성들의 민원을 처리하는 등 봉사를 통해 우리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쳤다. 그러나 북한은 소련군이 점령하고 공산주의 국가로 만들기에 힘을 쏟았다. 그들은 당시 소련군 대위 김성주를 꼭두각시로 임명하자, 그는 유명한 독립군 대장 고 김일성 장군의 이름을 도명하여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공산주의 국가를 세워갔다. 북한 사람들은 김성주는 모르지만 고 김일성 장군의 얘기를 전설처럼 들었기에 처..

목사 같은 판사 문기선 장로 1.

그는 조선 말기인 1896년 서울 당주동에서 출생하다. 부친은 구한말 고종황제의 시종무관으로 재직하다 한성경시청 총순, 강원도 경무관, 파주 군수를 역임한 관리의 가문이다. 그는 서울에서 매동소학교, 한성고보 사범과를 지원, 어린 학생들부터 애족심을 길러주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명에 따라 최우수성적으로 졸업하고(1911) 소학교 교사로 발령 받아 근무했다. 동족이 이유없이 차별 받자 교직을 떠나 법학도가 되다. 그때는 조국이 일제에 합병당한 일정시대로, 전국적으로 의병들이 일어나 항거했고 체포되면 재판도 없이 사형하는 등 조선인들이 차별 학대당하는 것을 보다 못해 교사를 사직하고 처음 개강한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수석으로 입학, 졸업했으나 일본인 졸업생만 법관으로 발령하고 조선인을 발령하지 않은 차별하자, 할..

한국의 간디 김성혁 장로 3

대통령 표창 위해 찾아 간 동 직원을 쫓아내다. 김성혁 교수의 불법과외를 조사하다 오히려 감동을 받은 형사가 본서에 들어갔다. 그리고 서장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김성혁 교수의 사설과외는 무인가 불법과외임을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단속보다는 오히려 국가가 장려하고 표창해야 할 선한사업임을 깨달았습니다. - 그게 무슨 말인가? "여기 보십시오.” 형사가 가지고 간 뉴스위크와 다이제스트 등 자료와 만나 본 사람들의 진술서 등 자세한 조사내용을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경찰서장이 놀랐다. “그렇다면 동사무소에 연락해서 새마을 성공사례의 하나로, 당국에 보고해서 표창을 상신하도록 하시오. 우리 관내에 처음으로 생긴 경사가 아니요?” “예. 그렇게 조치하겠습니다.” 그래서 1970년대 정부의 새마을 사업의 성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