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의 감동 이야기 37

십자가의 길을 철저히 따른 신학생들

1917년 10월 1일 경성성서학원에서 학생소요사태가 발생했다. 당시 세계1차대전이 유럽과 미국 일대에 전쟁으로 휩쓸어 그 영향도 대단하여 세계경제가 매우 어려울 때였다. 미국과 유럽교회의 신자들이 보내주는 선교비로 학원을 전적으로 운영하는 경성성서학원은 선교후원비가 갑자기 삭감되어 학교는 긴축운영을 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기숙사 학생들에게 공급하는 식사를 하루 3끼에서 2끼로 줄여 급식했는데, 식욕이 왕성한 신학생들이 하루 2끼로 산다는 것은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며칠 후 이에 불만을 품은 몇 사람이 선동하여 하루 3끼식 급식하지 않으면 동맹휴학하겠다면서 학생들이 학과수업을 거부, 강당에 모여 구호를 외치며 연좌시위를 했다. 당시 학원장 토마스 선교사와 교수들이 나타나, 학생들에게 학교재정의 어려움을..

독립운동가 김응조의 심문과 답변

김응조 목사(1896~1991)는 신학생 시절에 기미독립운동 선언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요, 민족주의자였다. 민족 대표 33인이 서울 종로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하자, 대기하고 있던 각 대학교 대표들 80명이 민족 대표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힘차게 불렀다. 김응조는 이날 성결교 경성성서학원의 대표로 참석하여 만세를 불렀다. 3.1만세운동을 계기로, 일제 조선총독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만세운동의 주동자 민족 대표들과 각 대학생 대표들을 체포하러 일경들이 전국을 샅샅이 뒤졌다. 김응조는 고향 경상도 영덕에 내려가서 고향의 유지들을 찾아가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설명하고 선동하려고 했으나 서울에서 미리 연락 받은 경찰들이 역에서 그를 알아보고 체포했다. 4월 15일이었다. 그러나 영덕에서..

똥통에서 건진 성경책

그날은 1963년 4월 어느 주일 아침이었다. 경기 화성군 반월면 당수리의 마을교회에 낮예배가 시작되었다. 신자들은 겨우 부녀자 10여명과 남자 2-3명이 마루예배당에 앉아 드리는 예배였지만 , 그들은 완고한 한 씨족들의 반대를 이기고 교회에 다니는 신앙의 용사들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신자들은 이상한 냄새에 신경이 쓰여 예배에 정성을 기우릴 수 없었다. 담임전도사가 설교를 마치고, 먼저 교회에 관한 광고를 한 후, 신자들에게 광고할 말이 있으면 하라고 했다. 당시 시골교회에서는 흔히 그랬다. 그러자 어느 여집사가 일어나서 “예배 시작 때부터 나쁜 냄새가 나는데 왜 그런지 조사했으면 좋겠습니다.”하고 말하자, 신자들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동감을 표시했다. 바로 그 때 맨 앞자리에 앉아있던 정정혜 집사가 조..

신사참배 반대한 강경교회 어린이들

지금 충남 강경시에 가면, 강경성결교회 넓은 마당에 커다란 화강암에 사연과 그림까지 조각한 큰 기념비가 서 있다. 이는 당시 우리 국민으로 '최초 신사참배 거부 선도기념비'로, 신사참배를 반대한 강경성결교회 교사와 어린이를 위한 기념비인데, 보는 이마다 국가와 신앙을 생각하게 하는 감동을 준다. 그 기념비의 사연을 간략하게 알아 보자. 1924년 10월 어느 주일이었다. 그때는 일제 강점기로, 강경성결교회의 주일(교회)학교는 어느 때보다 긴장감 속에서 반사회의를 했다. 그때 강경소(초등)학교 교사로 있는 김복희 반사가 열변을 토했다. “구약성경 다니엘서에 나오는 우상숭배 사건이 지금 우리 앞에 닥쳤어요. 총독부에서 우리 국민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기로 결정하고, 우선 소학교 아이들부터 시키기로 했답니다...

목사-진짜 목사- 바보 같은 성자로 불리운 사람

정재학(鄭在學)은 1906년 인천 앞 바다 덕적도에서 출생했다. 20세 때 고향교회에서 이용도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하여 큰 은혜를 받은 후, 기도를 하면 할수록 소명감이 불타올라, 25세 때 서울 아현동 경성성서학원을 찾아가 청강생으로 신학공부를 시작했다. 여름방학이 되자, 동료에게서 충남 서산에 교회가 없다는 말을 듣고서 기도를 했다. 기도를 하면 할 수록 자꾸 가고 싶은 마음이 들어 불쑥 서산읍에 찾아갔다.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 곳이지만, 그는 방 한 칸을 세로 얻었다. 이튿날부터 날마다 집집마다 다니며 전도를 하니, 하루에 몇 명씩 결심자들이 생겼다. 그는 그들과 함께 자기 셋방에서 예배를 드림으로써 서산성결교회가 개척되었다. 그는 보리죽으로 연명하면서 낮에는 전도, 밤에는 옥녀봉에 올라가 밤을 지..

한국 최초의 군인교회 이야기

1951년 1월 16일 오후였다. 6. 25전쟁으로 임시수도가 된 부산의 제3육군병원은 난데없이 술 취한 한 난동자에 의해 기물이 파괴되고, 떠드는 고함소리로 매우시끄러웠다. “나는 살인자다. 나 때문에 내 동생 식구들이 빨갱이 놈들에게 학살되었단 말이다.” 하고 소리지르며, 어린애처럼 엉엉 울기도 했다. 그리고 갑자기 아무 곳에나 쓸어져 잠들어 버렸다. 조용해야할 병실의 환경이 갑자기 돌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짜증스런 표정만 지을 뿐 누구하나 그 난동자를 만류하지 않았다. 그는 평소 환자들은 물론 군의관과 간호장교들에게 까지 신임과 존경을 받고 있던 곽우불(郭牛佛)대위였기 때문이다. 곽 대위는 점심시간에 고향인 전남 진도에서 찾아온 친척 한 분을 만났는데, 친척은 곽대위에게 슬픈 소식을 전했다. 공..

성결교회 첫 여전도사

성결교회 최초의 여전도사는 박기반(朴基盤)이다. 그녀는 1887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1910년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서울 무교동전도관의 전도사로 부임했다. 1907년 최초로 세운 복음전도관이 무교동 전도관이었는데, 1921년에야 성결교회라는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그녀는 성결교회 역사상 최초의 여전도사였고, 교회에 부인회를 처음으로 창설해 부인성도들을 신앙으로 훈련시켜 교회에 봉사하고 전도하게 하는 서울부인연합회를 조직하여 첫 회장으로 여성지도자의 명예를 안았다. 그가 이렇게 되기까지는 남모르는 고민과 쉽지만은 않은 두 가지의 큰 결단이 있어야 했다. 하나는, 감리교인으로 성결교인이 되기로 결단한 것이다. 박 씨 집안의 무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으나 어려서 부친을 병으로 잃었다. 다행히 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