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의 감동 이야기 37

한국의 간디 김성혁 장로 2

부채(負債)의식으로 시작한 장학사업 김성혁 장로가 이처럼 그의 과외강습비를 대학생 장학금으로 사용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가 중학생 때부터 선교사의 장학금으로 공부했고, 또 일본유학도 선교사들 장학금으로 공부해 평생 편하게 살 수 있었으니, 이제 그 빚을 갚아야 한다는 부채의식 때문이었다. 사도 바울이 선교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그 많은 영혼들을 구원했듯 김성혁 장로의 가슴에 깊이 박힌 장학에 대한 부채의식은 그의 끊임없는 실천을 통해 수많은 가난한 학생들의 교육을 잇게 했으며, 그 수준을 향상시켜 사회에 공헌케 했다. 또 나중에 그의 도움 받은 사람들은 가난한 학생들 뿐 아니라, 가난한 성도들의 사업자금과 대구 근처의 농촌 미자립 교회나 교역자들, 그리고 생활고에 시달린 나환자들에게까지 그 혜택이..

한국의 간디 김성혁 장로 1

“1956년부터 30년 동안 당시 대구의 사람들은 경북대학교 근처에서 작은 키에 검정고무신을 신고, 손에는 검정색 손가방을 든 촌로의 아저씨를 보았을 것이다. 겉으로 보면 ”채권 삽니다.“하고 골목을 다니던 당시 흔한 채권 장수였다. 그러나 그는 1956년부터 거의 30년 동안 대구에 있는 국립 경북대학교 문리대 영어과 김성혁 교수였다. 당시 대구나 경상북도 일대에 ‘괴짜 교수‘ 또는 ’한국의 간디‘라고 알려진 김성혁 교수, 그는 누구인가? 평양 미션스쿨과 동경외국어대학 유학 김성혁(金成赫)은 조선왕조가 일본에 강제 합병된 지 얼마 후, 1916년 11월 4일에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농부의 3대 독자로 출생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영민하고 부지런하게 성장하다 소학교에 입학하여 6년 동안 개근상과 우등상..

‘할렐루야’로 일본성서학원 입학한 사람

1907년 7월, 그러니까 지금부터 114여 년 전 일이다. 미국인 카우만과 길보른 선교사가 동양의 선교를 목적으로 일본 동경에 세운 동경성서학원에 어느 날 이상한 복장을 한 두 남자가 나타났다. 그들은 여름이어서 시원한 모시옷을 입었는데. 머리는 검은 갓을 쓰고, 갓 속에는 상투를 틀었다. “선생님, 이상한 사람들이 나타났어요.” 수업을 하다 열려진 창을 통해 이들을 처음 본 일본 학생이 놀라 소리 질렀다. 선교사에게 수업을 배우던 일본학생들이 모두 창 곁으로 달려가 보고 놀랐고, 가르치던 선교사도 이를 힐끗 본 후, 2층 교실에서 1층으로 걸어서 내려갈 때 호기심에 학생들 몇이 따라 내려갔다. 그동안 중국인, 한국인 몇 사람을 이 학교에서 2년 간 무료로 공부를 시켜 전도자로 귀국 시켰는데, 저런 복..

불교에서 기독교 전도대장 된 목사

천세광(千世光) 목사(1904~ 1964)의 본명은 천세봉(千世鳳)이다. 그는 경북 군위 읍에서 부모의 장남으로 출생하여 선비인 아버지보다 대한제국 말기 무관출신인 할아버지를 많이 닮아할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 매일 할아버지는 아침마다 불경을 소리 내어 외우시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고, 아버지는 공자 왈, 맹자 왈 하는 사서삼경을 읽는 유교 선비여서, 종교가 다른 가정이자만 종교 다툼은 한 번도 없었다. 그가 여섯 살 어느 날, 할아버지가 마을에서 유명한 점쟁이를 불러 장손의 사주를 보게 했는데, 뜻밖에 ‘목숨이 짧으니 빨리 절에 입적시키라’는 점괘를 주었다. 금이야 옥이야 하고 키우는 장손의 수명이 짧다는 말에 충격 받은 할아버지는 곧 명령을 내려 가까운 절에 그의 이름을 입적시켰다. 이렇게 ..

만주에서 전도하다 죽은 성결교회 창립자

만주에서 전도하다 죽은 성결교회 창립자 - 정빈(鄭彬) 전도사 1878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그는 당시 전통문화로 유교를 숭상하고 조상제사를 드렸으며, 8살에 서당에 들어가 한학을 공부했다. 그런 그가 10살쯤 기독교에 입신했는데, 1882년 해주에는 북경에서 세례 받고 돌아 온 서상윤의 전도로 교회가 이미 세워졌었다. 그는 관례에 따라 15세쯤에 결혼했으나, 주일학교에서 배운 신앙에 대한 열망 때문에 이듬해 가족을 데리고 서울로 갔다. 그리고 1893년에 세워진 종로의 연동교회의 무어(Moore) 선교사가 목회하는 교회의 교인이 되어 종로 YMCA에 가서 성경공부와 신앙강좌를 들었다. 강사 중 세브란스 의전의 학생 고명우 씨가 있었다. 고명우는 청년들에게 ''이미 기울어져 가는 조국을 붙잡기보다 영..

흰 순교자 추명순 전도사여

추명순 전도사 추모 시 - 류재하 남편의 방탕에 울고, 매 맞다 칼을 품고 산, 한 많은 세월...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 어떤 전도할머니 따라 나선 서천의 비인성결교회 이곳에서 시작된 제2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세월이었다. 1968년 성령에 이끌려 찾아 나선 섬, 섬, 섬, 고군산 군도! 파도와 미신과 가난과 싸우며 기도와 눈물로 복음의 씨 뿌리기 20여년 미신 조장하던 섬 무당들 쫓겨 가고 끝자락 말도에서 시작한 성령행전은 야미도 신시도 선유도 무녀도를 지나 장자도 관리도 방축도 명도 등 유인도 11개 섬마다 교회들이 우뚝 서 새벽마다 퍼지는 찬송과 기도소리에 갈매기들이 ‘끼룩 끼룩’ 화답했으니 하나님의 은혜 아니던가. 지금 고군산은 새만금 간척사업으로 호남과 호서를 잇는 풍요의 땅이 되어 기..

한국의 다미엔 정순석 목사 2

“주님, 나는 이곳에 있으나 내 몸이 나병이 옮겨질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는 저를 용서해 주소서. 저는 진정 예수님 사랑이 없사오니, 제게 주님의 그 크고 깊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주소서. 죽으면 죽으리이다.” 그는 이렇게 눈물로 회개의 기도를 했다. 그때부터 그는 독신이기에 나환자가 해주는 밥을 조금도 거리낌 없이 즐겁게 먹었다. 신자들이 비로소 좋아서 마음 열고 대화하고, 그가 시키는 대로 교회의 일을 했다. 교회는 천막이고 신자들 집은 움막이나 판잣집이었다. 그들은 죽기만을 기다리는 몸으로 삶의 의지가 전연 없었다. 그는 깨달았다. 목사의 일은 먼저 신자들에게 삶의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고. 그래서 그는 성경말씀을 바탕으로 격려하고 때로는 눈물로 호소하면서 그들을 영의 양식과 육의 양식을 ..

한국의 다미엔 정순석 목사 1

정순석 목사(1922~ 1981)는 평북 의주 출생으로 유명한 소설가 정비석 씨의 동생이다. 그보다 11살이나 많은 큰형이지만, 고향에서는 모두 교회에 다니는 신앙가족이었다. 큰형은 19살 때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가 귀국했으나 서울에서 살면서 시인이 되고 나중에는 소설가로 이름을 날렸다. 순석이는 신의주 사범학교에 입학하고 아이들을 훌륭한 인재로 키우겠다는 사명으로 살면서, 명작소설과 신앙전기를 읽고 많은 감동 받았다. 그래서 감동적인 이야기를 교회 어린이들에게 성경말씀과 함께 그대로 가르치면서 자기도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기도했다. 그가 사범학교를 졸업한 것은 1941년 일본이 미국을 침략해서 태평양전쟁이 나던 해였다. 전쟁 준비로 일본총독부는 조선인에게 공출이란 명목으로 농민의 농산물을 강제로 반..

예수 믿고 상투 잘라 몰매 맞은 사람

- 김상준 목사의 작은 이야기 한국성결교회를 창립한 주역의 한분인 김상준 목사는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1881년에 엄격한 유교가문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철저히 유교를 섬기며, 예절과 전통을 공부하면서 소년시절을 지냈다. 그는 전통 있는 의성 김씨 한 가문의 외아들이어서 어린 나이에도 한 달에 3번씩 생전에 보지도 못한 조상님의 제사에 끌려 다니며 억지로 절을 했다. 그러면서도 '죽은 조상들이 어떻게 자손에게 복을 줄까?" 하는 의문도 품었다. 그가 20세가 되면서 가정의 대소사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22세가 되던 어느 날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수 백리 떨어진 평양에 처음으로 심부름을 갔다. 모처럼 처음 대도시 평양에 가기 위해 새 바지저고리에 상투를 곱게 틀고, 그 위에 나들이 말총갓을 멋 있게 ..

바로 그 사람

순교자 문준경을 추모하며 이곳에 ‘바로 그 사람’이 있다. 생전에 그를 부르는 많은 이름 있었으니 전도사, 스승, 산파, 간호사, 개척자, 씨암탉, 사랑의 어머니 그리고 거룩한 순교자. 오랜 미신에 찌든 섬마을 사람들 오직 한 여인 때문에 하늘 백성들로 거듭나 빛으로 소금으로 증도가 천사의 섬으로. 이 섬, 저 섬 걷기로 연간 검정고무신 8컬레 닳고 섬마다 나룻배 타고 다니며 복음으로 섬기다가 온갖 미신 다 몰아내고 여섯 성결교회를 세우고 믿음의 청년들 신학교 보내 목사들 세웠더니 6.25 전쟁 공산당들 땅굴에 대창 찔러 순교했네. 그의 순교의 피로 세운 신안군 성결교회가 60여 교회 그가 키운 목사들 8명, 한국교회 큰 지도자 되었고 증도의 '문준경순교기념관'은 한국교회에 오픈되어 연간 4만명 교역자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