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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

류재하 터벅터벅 뒷짐 지고 앞서가는 아버지 타박타박 뒷짐 지고 따라가는 어린이 우습고도 정확한 유 전 자 - 월간 창조문예(2018-10) - 소솔 제2시집 수록(2019) -------------------------------------------------------- 어른이 쓴 동시이다. 3인칭 시점에서 본 아버지와 아들이 앞뒤로 서서 걸어가는 머습을 유머러스하게 다룬 작품이다. 어린이는 아버지의 모습따라 자기도 모르게 걷는 시늉을 하는데, 좀 다른 것은 아버지는 '터벅터벅'으로, 어린이는 '타박타박'소리로 의태와 의성을 동시에 표상하므로 어른과 어린이임을 알게 하는 효과가 있다. 한국어의 아름다운 유산을 살려나가는 기쁨이기도 하다.(박이도 전 경희대 국문학 교수)

2020.11.16

성탄절 별곡別曲

류재하 아가야, 너는 아느냐 성탄절이 왜 연말年末에 있는 지를 한 해 동안 쌓인 사람들의 죄를 씻어주시려고 새해에는 모두 새 마음으로 살게 하시려고 해마다 우리의 죄 짐을 홀로 지시기 위해 연말에 오시는 예수님이신 것을. 아가야, 너는 아느냐 성탄절이 왜 겨울에 있는지를 추위에 떠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시려고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았다는 희망을 주시려고 해마다 하늘의 복된 소식을 가득 안고 겨울에 오시는 주主님이신 것을. - 창조문예(2002 12호) - 소솔 제2시집 수록(2019)

2020.11.16

어느 오케스트라의 연주

류재하 알렉산더 아니시모프가 지휘하는 부산시립교향악단과 유영욱 피아니스트가 협연하는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협주곡 제1번 제1악장 전에 몇 번 들은 곡이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가슴을 파고든다. 지휘자가 러시아인이기 때문일까 작곡가와 DNA가 같아서인지 곡 해석이 탁월하고 피아니스트의 열정적 연주 때문일까. 땀을 뻘뻘흘리며 터치하는 건반에는 불꽃이 튀는데. 카메라 앵글 따라 보여주는 오케스트라 멤버들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현악기 연주자들 활시위가 쌩쌩하고 관악기 연주자들 뺨이 벌게지면 드러머의 가볍고도 장중한 울림이 청중을 사로잡는다. 지휘자 손짓에 따라 모든 악기가 최고음으로 협연자의 정열적 연주가 거대한 하모니로 승화되어 그토록 가슴을 울리고, 긴 여운을 남겼나보다. 나는 오늘 아침 신비한 삼위일체의 환..

2020.11.16

대숲의 합창

류재하 담양에 가면 맑고 푸른 합창소리가 들린다. 고지산 남서쪽 부챗살처럼 활짝 펼쳐진 언덕 대나무 소나무 숲을 이룬 초록동산에 찾는 이마다 몸과 마음이 청순해 진다. 솔바람에 송화松花 가루 날고 댓바람에 죽향竹香이 은은하면 하늘을 찌를 듯 뻗은 울창한 대숲에서 봄의 합창소리가 들려온다. 탁, 탁, 탁, 탁 나무끼리 부딪치는 리듬소리 사아악, 사아악 소나기 오는듯한 댓잎소리 짹, 짹, 짹, 짹 숲을 날며 노래하는 참새소리 뻐꾹, 뻐뻐국 먼 산에서 짝 찾는 뻐꾸기 소리 이 소리, 저 소리가 어울려 내는 합창소리에 귀를 기우리면 세파에 엉킨 이기심이 옷을 벗고 세속에서 잃어버린 자아自我가 다가오며 4월의 봄볕은 저만치 비켜가고 있다. - 작시일(2003. 4. 12) - 소솔 제1시집 수록(2013) ---..

2020.11.16

나팔소리

유년시절. 서울에서 오신 젊은 목사님이 가끔 부는 트럼펫 소리 그 힘찬 나팔소리에 끌려 교회에 자주 찾아갔었다. 청소년 시절. 번화한 네거리를 걷다 갑자기 들려오는 나팔소리에 고개를 돌렸을 때 “십자가 군병들아 主 위해 일어 나 ---“ 몇 사람 안 된 전도 팀에 그 목사님과 그 나팔이 둥둥 울리는 북소리와 함께 거기에 있었다. 그 날 이후 어느 거리에서나 어느 집회에서나 나팔소리가 들릴 때 마다 먼 훗날 천지가 진동震動할 하늘의 나팔소리를 생각한다. 오늘도 나는 잡다雜多한 세상소리에 두 귀를 막고 언젠가 하늘에서 들려 올 천사들의 나팔소리를 향해 조금씩 귀를 열고 나의 사명 찾아 힘차게 달려가련다. - 월간 활천(1991- 11) - 소솔 제1시집(2013) 수록

2020.11.16

호랑이와 토끼

누가 내게 띠를 물으면 서슴없이 ‘호랑이’라고 말했다. 음력 1938년 12월, 무인戊寅생이기에 언젠가 누가 내 생년월일을 묻더니 나더러 ‘토끼’ 띠 기묘己卯라고 했다. 양력 1939년 1월생이기에 그래선지 어려서부터 내 속에는 호랑이도 살고, 토끼도 살고 있다. 기분이 나쁘면 곧 물어뜯을 듯 울컥 성이 났다가 조금씩 잦아들고 조금 불리한 일이 엿보이면 귀를 쫑긋하고 도망치려다 마음을 다잡는다. 나는 평생을 이 두 마리 짐승을 길 들이면서 살아가고 있다. 하늘에서 오신 그분이 내 마음에 들어오신 후부터 - 소솔 제2시집 수록(2019)

2020.11.16

시소

내가 높아질 때 네가 낮아지고 내가 낮아질 때 네가 높아지고 내가 맨 앞자리에 서면 당신은 꽁무니에 서 있고 내가 이름 없는 자로 살면 당신의 이름 더욱 높아지고 내가 잘난 척 으스대면 당신은 못난 척 숨어버리시고 당신이 땅에 내려오심으로 내가 하늘에 오를 수 있고 당신이 나 위해 죽으심으로 내가 비로소 살 수 있고 당신이 하늘나라에 오르심으로 내가 땅에서 사명자로 살 수 있고... 시소를 탈 때마다 시소 타는 것 볼 때마다 세미한 하늘 음성 듣게 하소서. - 소솔 제2시집(2019) 수록

2020.11.16

믿음이란

믿음이란 바라는 것의 실상(히 11:1) 씨앗을 보면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 주렁주렁 열매까지 맺히는 걸 상상할 수 있는 것 달걀을 보면 노란병아리로 깨어나 “꼬끼요!” 홰 치고 우는 닭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것 어린이 보면 가정의 좋은 어버이 우리 사회의 건실한 시민 하늘나라 거룩한 백성 되는 꿈을 꾸는 것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 상록수문학(2014-여름호) - 소솔 제2시집(2019)에 수록

2020.11.16